'콘텐츠 파워'로 韓쥐락펴락…넷플릭스發 쓰나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 'CES 2016 '에서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CEO (최고경영자)가 기조연설에 나섰다. / 사진제공=넷플릭스
헤이스팅스 CEO의 말처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제공하는 글로벌 콘텐츠 공룡 넷플릭스는 케이블TV 등 전통 미디어는 물론 글로벌 콘텐츠 사업자(PP)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벤치마킹 대상이다. 해마다 수십조원을 쏟아부어 만드는 오리지널 콘텐츠와 전세계 190개국에 뻗어있는 플랫폼 파워가 넷플릭스 힘의 원천이다.
넷플릭스 발(發) 쓰나미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상파 방송의 몰락과 유료방송 시장 재편, 토종 OTT 분화와 합종연횡,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ISP·통신사)·해외 콘텐츠 제공업자(CP·넷플릭스 등)의 망 이용료 분쟁, 플랫폼·콘텐츠 사업자의 사용료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넷플릭스가 있다. 급기야 LG유플러스에 이어 국내 유료방송 1위인 KT도 넷플릭스와 제휴 계약을 맺고 3일부터 올레tv에 넷플릭스 콘텐츠를 실었다. 가입자 확보 경쟁을 위해선 콘텐츠 동맹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넷플릭스의 콘텐츠 파워를 여실이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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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가 처음 한국 시장에 발을 들인 건 불과 4년 전(2016년)이다. 초기엔 가입자가 완만히 늘었으나 지난해부터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앱 조사업체 와이즈 앱에 따르면, 2018년 1월 34만 명이던 넷플릭스 유료 가입자는 지난해 10월 200만 명을 넘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이 부른 비대면(언택트) 문화 확산으로 지난 3월 유료 가입자는 270만 명을 돌파했다.
CJ ENM·JTBC 연합군인 티빙에 최근 합병을 공개 제안한 배경이다. 공룡 넷플릭스에 대항하려면 ‘덩치 키우기’와 ‘콘텐츠 제휴’가 불가피하다는 위기감에서다.
넷플릭스의 콘텐츠 파워가 커지면서 국내 콘텐츠 사업자들의 ‘제값받기’ 움직임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tvN과 엠넷 등 인기 채널을 운영하는 CJ ENM과 케이블 TV업체인 딜라이브는 최근 콘텐츠 사용료 인상 여부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정부 중재로 가까스로 갈등을 눅였지만 플랫폼을 상대로 한 ‘을(콘텐츠)의 반란’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 OTT들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음저협)의 음악 저작권료 분쟁도 결이 비슷하다. “제값을 낸 넷플릭스처럼 매출액의 2.5%를 음악 사용료로 달라”는 음저협과 “0.56%가 적정하다”는 토종 OTT의 주장이 맞선다. 여차하면 법정 공방도 불사할 만큼 냉랭한 분위기다.
"미디어 주권 상실"vs "아이폰 들였다고 나라 팔았나"
한류 드라마처럼 현지 제작사가 만든 킬러 콘텐츠도 제값을 주고 사들여 해외 곳곳으로 송출한다. ‘미스터 션샤인’을 만든 CJ ENM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 지분 5%를 지난해 11월 인수하기도 했다. 성장성이 큰 아시아를 넘어 세계 시장을 잡으려면 ‘한류 콘텐츠’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한국 콘텐츠 투자액은 매년 광폭으로 늘고 있다. 넷플릭스는 올해 K콘텐츠 확보를 위해 투자액을 3331억원 수준으로 확대한다. 2018년 920억원, 2019년 2481억원에서 더 늘었다.한국 시장에 진출한 2016년(150억원)과 견주면 4년 만에 투자 규모가 22배 커진 셈이다.
넷플릭스가 킹덤 시즌1 제작 당시 투입한 회당 제작비는 통상 제작비(5억원 안팎)의 4배 이상인 20억원을 웃돌았다고 한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물량 공세의 실례다. 강신범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는 “넷플릭스 오리지날 ‘미스터 션샤인’의 경우 편당 제작 예산이 16억~17억원에 달했다”며 “국내 편당 제작비 한계가 10억원 정도인 상황에서 제작사들이 넷플릭스에 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메기'냐 '황소개구리'냐…넷플릭스의 두 얼굴
넷플릭스발(發) 미디어·콘텐츠 생태계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갈린다. 넷플릭스가 콘텐츠 중심의 질적 경쟁을 자극하는 ‘메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외래종 포식자인 ‘황소개구리’처럼 국내 미디어 생태계를 교란하고 잠식할 것이란 우려가 교차한다.
콘텐츠 업계에선 넷플릭스를 타도해야 할 경쟁 상대가 아닌 국내 미디어 사업의 규모와 경쟁력을 키우는 상생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대체로 많다. 콘텐츠 제작사 관계자는 “일일이 발품을 팔 지 않아도 해외로 콘텐츠를 수출하고, 감독과 배우를 알릴 수 있는 교두보로, 또 넷플릭스의 과감한 투자는 열악한 제작 생태계에 단비가 되고 있다”며 “미디어 산업이 굉장히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고 했다.
최근 넷플릭스와 제휴한 유료방송 1위 KT의 김훈배 커스터머신사업본부장(전무)은 “애플이 국내 시장에 진출할 때 ‘나라 팔아먹는다’는 얘기까지 있었지만 한국 스마트폰의 경쟁력이 생기는 효과가 있었다”며 “넷플릭스가 악영향만 끼치는 게 아니다. K콘텐츠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토종 OTT들도 경쟁을 통해 자생력이 생기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다.
고경곤 한국 인터넷전문가협회 회장은 최근 한 포럼에서 “콘텐츠 제작사들이 넷플릭스 앞에서 줄을 서고 있다. 하청업체로 전락할 위기라는 말도 한다”고 전했다. 한류 콘텐츠가 만들어 내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정작 넷플릭스가 독식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희주 콘텐츠웨이브 정책기획실장은 “당나라 군대(넷플릭스)가 쳐들어오는 걸 모르고 신라·백제(국내 미디어기업)가 서로 싸우고 있는 꼴이다. 미디어 주권을 상실할 위기”라고 했다.
IPTV 月1만원, 넷플릭스엔 1만3000원…'코드커팅' 현실화
앱·리테일 분석서비스 와이즈앱·와이즈리테일에 따르면, 지난 3월 국내 이용자들의 넷플릭스 결제 금액은 역대 최대인 362억원이었다. 모바일 빅데이터 플랫폼인 아이지에이웍스가 추정한 같은 달 넷플릭스 이용자 수(약 393만 명)를 대입하면 인당 월 평균 1만3287원의 요금을 지불한 것으로 추정된다. 넷플릭스의 국내 요금제는 베이직 9500원, 스탠다드 1만2000원, 프리미엄 1만4500원으로 나뉜다. 넷플릭스 결제금액은 4월 다시 439억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19년 방송시장 경쟁상황평가 보고서를 보면, 2018년 국내 유료방송(IPTV·케이블TV 등)의 전년 가입자매출 기준 월평균 요금은 1만 532원이다. 넷플릭스의 국내 이용자수는 지난해 12월만 해도 285만 명으로 국내 OTT의 웨이브(wavve)의 294만 명 보다 적었다. 하지만 올 들어 가입자 수가 역전했고, 지난달에는 넷플릭스(467만명)와 웨이브(272만명)의 격차가 200만명 가깝게 벌어졌다.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을 적극 공략하면서 토종 OTT와 유료방송 사업자의 타격이 현실화한 셈이다.
넷플릭스에 밀려 토종 미디어들이 줄줄이 사업을 접고 있는 아시아 상황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시아는 미국 시장 둔화를 타개하려는 넷플릭스에서 가장 성장성이 높은 시장이다. 넷플릭스의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매출은 15억 달러로 2년 전과 견줘 3배 성장했다.
넷플릭스의 집중 공략이 이어지자 지난 4월 동남아시아 대표 OTT인 훅(Hooq)이 서비스를 중단했다. 말레이시아 1위 OTT인 아이플릭스도 빚을 줄이기 위해 인력 감축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2018년 10월엔 워너가 인수했던 한류 드라마 전문 OTT인 ‘드라마피버’가 문을 닫았다. 업계 관계자는 “넷플릭스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오리지널 아시아 콘텐츠 투자에 나서자 동남아시아 로컬 OTT가 줄줄이 사업을 접고 있다”며 “국내 미디어·콘텐츠 생태계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넷플릭스를 어이할꼬…규제 테이블 오른 OTT
/사진=AFP
넷플릭스 등 글로벌 기업의 국내 방송통신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OTT 산업 규제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팽팽하다. 사업 진출과 인수합병·콘텐츠 편성·요금 등 다방면에 걸쳐 빽빽한 규제를 받고 있는 방송 사업자와 달리 OTT 사업자는 그간 ‘최소 규제 원칙’을 적용 받았다. 새 미디어로서 성장 초기 단계인 데다, 경쟁을 촉진하고 이용자 후생을 늘리려면 과도한 규제는 시기상조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OTT는 현재 방송법(지상파)이나 IPTV법(IPTV)이 아닌 전기통신사업법상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된다.
업계에선 OTT 산업이 K 콘텐츠 한류 확산의 첨병인 만큼 경쟁과 혁신 토양을 만들어주기 위해선 현재 방송법을 비롯해 규제 완화에 과감히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도 지난 6월 ‘디지털미디어 생태계 발전방안’을 발표하면서 “규제 신설은 신중히 하고 기존 규제를 과감히 완화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문제는 해외 OTT다. 유튜브나 넷플릭스가 아무런 제약 없이 국내 시장서 수익을 거둬가는데, 이로 인해 정작 국내 기업들의 타격이 만만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정작 국내 OTT 사업자들은 기간통신 혹은 방송사업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기존 규제를 그대로 적용받고 있다. 제도의 사각지대를 틈타 이익만 챙기는 글로벌 사업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동장치를 마련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희주 콘텐츠웨이브 정책기획실장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간담회에서 “국내 OTT 시장은 여러 측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정부가 OTT 규제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경곤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장은 “유럽연합에는 자국 콘텐츠를 의무적으로 30% 비율 이상 확보하도록 하는 자국콘텐츠 쿼터제가 있다”며 “국내에서도 이런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3일 연임 일성으로 “글로벌 기업이 국내 방송통신 시장을 잠식하면서 미디어 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며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춰 미디어의 경쟁력과 공공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를 혁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