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인 코리아’ 달고…인공태양 핵융합로 진공용기 佛 간다

머니투데이 류준영 기자 2020.04.20 14:10
글자크기

1년이면 200m 배 한척 건조하던 현대重도 10년 걸려…나머지 3개 섹터 공정률 77% 이상 ‘2021년 말 이송’

프랑스 카다라쉬에 위치한 ITER 건설부지 모습/사진=핵융합연프랑스 카다라쉬에 위치한 ITER 건설부지 모습/사진=핵융합연


아파트 11층 높이(약 30m)에 이르는 국제핵융합실험로(International Thermonuclear Experimental Reactor·ITER)는 마치 장난감 ‘레고’처럼 크고 작은 부분품들을 정교하게 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 초대형 구조물 제작을 한국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20일 국가핵융합연구소(이하 핵융합연)는 현대중공업과 함께 10년 간 개발한 ‘핵융합로(토카막) 진공용기’의 첫 번째 섹터(섹터 6번)를 내달 ITER 건설지인 프랑스로 운송한다고 밝혔다. 진공용기는 ITER 사업 전체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장치다. 때문에 ITER 국제기구가 진행 상황을 면밀히 관리한다. ITER 국제기구에 따르면 진공용기 제작은 한국과 EU(유럽연합), 러시아 등 3개국 9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초대형 크기만큼 기술 난제도 최상급…세상에 하나뿐인 진공용기 물릴 수 없다 ‘배수의 진’
도넛처럼 원통 형태인 진공용기는 핵융합로에서 실제 태양처럼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도록 초고온 플라즈마(고온·고압에 의해 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된 기체)를 가두는 공간이다. 진공용기는 높이 13.7m, 무게 5000톤(t)의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거대 장치 내부에 우주와 같은 진공상태를 구현하고, 1억℃ 이상의 플라즈마를 만들어 유지해야 하는 만큼 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난이도는 최상급이라 할만 하다. 또 진공용기는 핵융합 반응의 결과로 발생하는 중성자의 1차 방호벽인 데다 다양한 내벽 구조물을 지지해야 하는 기초구조물이라서 더 어렵고 복잡한 기술을 요구한다. 이번 6번 섹터 완성은 아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초대형 진공용기 제작의 난제를 가장 먼저 풀어낸 사례로 꼽힌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진공용기 섹터의 일부분/사진=핵융합연한국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진공용기 섹터의 일부분/사진=핵융합연


진공용기는 대형블록을 연결해 조립하는 선박 건조방식처럼, 마치 케이크를 40도 간격으로 자른 듯 9개의 대형 섹터로 등분된 형태로 나눠 제작한 후 조립해 완성한다. 당초 우리나라는 이 중 2개 섹터(1, 6번)를 국내 조달품목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은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 진공용기의 설계·제작에 참여해 쌓은 기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2010년 ITER 국제기구와 제작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2016년 현대중공업은 당초 EU(유럽연합)이 맡고 있던 2개의 섹터(7, 8번)를 추가 수주했다. 7·8번은 EU의 컨소시엄 업체가 만들 예정이었지만 제작 일정에 차질을 빚자 ITER 기구가 현대중공업에 제작을 의뢰해 왔던 것. 이로써 전체 9개 섹터 중 절반에 가까운 4개 섹터를 한국에서 제작하게 됐다. 이는 한국 기업이 지닌 기술력과 제작환경을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로 풀이된다.

현대중공업이 완성한 6번 섹터는 ITER 진공용기 총조립의 기준점이다. 이 섹터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 다른 섹터들을 순서대로 조립할 수 있다. 전례가 없던 초정밀 초대형 장치를 제작하는 만큼 요구되는 성능 조건과 검증 과정은 험난했다.


ITER 진공용기와 내부 단면도/사진=핵융합연ITER 진공용기와 내부 단면도/사진=핵융합연
최창호 ITER 진공용기부장은 “자동차 8000대를 선적하는 길이 200m 배 한척 건조하는 데 1년 반이면 충분한 현대중공업이 10년에 걸려 만들었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세상에 없던 경험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핵융합연 진공용기기술팀과 현대중공업은 “설계상의 복잡한 3차원 형상과 이중벽 구조를 정밀한 치수에 맞춰 제작하는 게 가장 벅찬 과제였다”고 말했다. 또 “ITER 진공용기는 내벽과 외벽의 이중구조로 설계됐는데 프랑스 원자력압력용기 법령에 맞춰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공학기술로는 접근이 힘들었다”며 “특히 용접부에 대해서는 100% 완전하다는 기술적 검증이 필요했는데 통상적 비파괴검사 기술로는 이중구조의 경우 접근경로가 제한되기 때문에 진단과 측정이 무척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진공용기 조립 모습/사진=핵융합연진공용기 조립 모습/사진=핵융합연
진공용기 섹터들은 무수히 많은 성형과 용접을 통해 제작된다. 특히 60mm 두께의 스테인레스강 소재 내벽에 차폐블록과 블랑켓, 다이버터, 코일과 진단장치 등 수많은 내벽 부품을 촘촘하게 조립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정밀한 제작 치수가 요구된다. 핵융합연 ITER 한국사업단은 “관련 분야 국제전문가들조차 과연 그렇게 정밀한 성형과 용접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회상했다.

무엇보다 ITER 진공용기는 양산품이 아니라서 제작진이 안은 부담감이 매우 컸다. ITER 한국사업단 관계자는 “일반적 양산제품은 출시 후 다소 문제가 있거나 목표 성능이 구현되지 않더라도 후속 제품에 개선사항을 반영하고 계속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ITER 진공용기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데다 다시 물릴 수도 없는 장치라서 배수의 진을 쳐야 하는 부담감 속에 첫 제품을 완성했다”고 털어놨다. 연구진은 엄격한 기술요구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산해석기법을 이용한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시험하며 본품 제작에 대비했다는 후문이다.

1·7·8번 섹터 2021년 말 완성…“국제 프로젝트 참여 사명감, 자부심으로 최선”
나머지 3개 섹터 공정률은 7번이 92.8%, 8번이 85%, 1번이 77.6%로 현재 우리나라가 책임지고 있는 모든 진공용기 구조물은 2021년까지 완성돼야 한다. 일정이 빠듯하나 ITER 국제기구는 한국 연구진이 납기 일정을 제대로 맞춰줄 것으로 믿고 있다. 다른 ITER 사업 참여국들의 동종업무 부서와 비교하면 국내 진공용기 전담인력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나 맡고 있는 구조물의 수나 진행 상황은 수 배 이상 많고 빠르다는 게 ITER국제기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이 같은 가속도를 붙이게 된 배경이란 설명도 뒤따른다.

이경수 ITER 전 부총장은 “사업 목표일정을 맞추기 위해 일하다 보니 밤낮 구분이 사라진 지 오래”라며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함께 무엇보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정말 가치 있는 일을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늘 최선을 다하게 만든 힘이 됐다”고 말했다.

ITER 건설현장, 핵융합로가 들어설 토카막 빌딩 내부/사진=ITER 국제기구ITER 건설현장, 핵융합로가 들어설 토카막 빌딩 내부/사진=ITER 국제기구
韓 수주 규모 5761억원…욕조 반 분량 바닷물로 한 가정서 80년간 쓸 전기 생산
ITER는 2025년 최초 플라즈마 발생을 목표로 한다. 우리나라와 EU(유럽연합), 일본, 러시아, 미국, 중국, 인도 등 7개국 과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강국이란 명성에 걸맞게 4개 진공용기 섹터와 40여 개 메인포트, 진공용기 지지구조물 제작을 총괄하고 있다. 핵융합연에 따르면 수주한 과제만 115개이며, 이는 약 5761억원 규모에 이른다.

ITER 총사업 예산은 132억 유로(약 17조원)로 현존하는 과학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다. 전체 비용 중 EU가 45.46%를 투자하고, 나머지 6개 회원국이 각 9.09%씩 분담한다. 우리의 경우 2003년부터 ITER 건설에 참여, 국비 8838억원(2017년 기준)을 투입했다.

욕조 반 분량(35리터)의 바닷물에서 추출한 중수소(1g)와 노트북 1대에 장착된 배터리 속 리튬량 정도에서 추출한 삼중수소(1.5g)를 결합해 생산한 핵융합 에너지는 한 가정에서 80년간(월 300kWh 소비 기준) 사용할 수 있는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이는 석탄 20톤(t)으로 생산한 전기량과 맞먹는다. 핵융합 발전은 풍력·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에 비해 넒은 부지가 필요없고 날씨나 기후영향도 받지 않는다. 물을 원료로 써 반 영구적인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에너지원의 80% 이상을 해외 수입에 의존한다. 앞으로 계속 늘어날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핵융합 에너지 확보는 이제 선택 아닌 필수가 돼가고 있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