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회의와 보고로 당국자들과는 통화조차 어려웠다.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한 고위 당국자는 안쓰러웠는지 “여기서 이러지 말고 97년 외환위기 극복 백서를 찾아봐” 귀띔해줬다. 급하게 백서를 구해 펼쳤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과 당국의 대응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한발 앞 선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최근 2008년 위기 극복 백서를 꺼내 들었다. 충격에 비례해 규모만 커졌을 뿐 당국이 꺼낸 카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산업, 금융, 가계 등 각 분야에서 벌어질 혼란과 고통이 그려졌다. 하지만 어느 한 미국 시인이 얘기했듯 이 또한 지날 갈 거다. 혼란이 끝나면 상황 수습 국면이 펼쳐진다. 안타깝지만 시차의 문제지 정부의 부양책에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기업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김없이 KDB산업은행이 등판할 거다.
대우조선해양, KDB생명, STX그룹, 대우건설, 성동조선… 그간 ‘KDB 그룹’이 거느린 기업들 중 효율적인 경영 개선을 통해 제대로 매각이 이뤄졌던 곳이 있었나. 그런데 누구도 여기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산업은행을 동원하는 순간 새로운 화근이 싹튼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초저금리 시대다. 시중에 돈이 넘쳐난다. 그 돈을 돌게 해줘야 한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 돈을 공급해도 은행이 그 돈을 쓰겠나.
PEF가 경제 안전망이 돼야 한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PEF 말고 할 곳이 없다. 외환 위기를 거치며 토종 자본이 주축이 된 사모펀드 필요성이 제기됐다. 2004년 PEF 제도가 도입됐고, 국내 PEF 시장은 갈수록 성장했다.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 대체투자 확대, M&A(인수·합병) 시장 성장, 경쟁력 있는 운용 인력 등이 그 토대가 됐다. 경영참여형 PEF의 출자약정액 총액은 2019년 3분기 말 약 82조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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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그룹의 코웨이, 동양그룹의 동양매직(현 SK매직), SKC코오롱PI 등 그룹사의 유동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알짜 매물로 나온 곳들도 PEF가 인수했다. 인수 뒤 경영 개선 효과가 극대화되며 더 높은 가치에 다시 기업의 품에 안겼다. PEF가 산업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정부가 구조조정의 키를 쥐고 싶다면 산업은행은 PEF에 자금만 공급하고 뒤로 빠져야 한다. 성공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굳이 꼽자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만든 ‘모태펀드’ 방식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책임 소재도 명확해지고, 자본시장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또 한 번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에 진입했다. 우린 과연 과거 두 차례 위기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교훈을 얻었다면 바뀌어야 한다. 또 한 번의 헛발질이 나올까 우려스러워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