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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수송보국'에 바쳐…탄생 100주년 조중훈 한진 창업주

머니투데이 주명호 기자 2020.03.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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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보국(輸送報國)'의 일념으로 육·해·공 종합 물류기업을 만들어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지난 3월 5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수송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선구적 경영인이다.

조중훈 창업주가 수송·물류업을 택한 것은 기업인으로서 국가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인 만큼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조중훈 창업주는 1920년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4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의 사업 부도 후 가세가 기울자 당시 국비 교육기관이던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에 진학해 2년만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일본 고베에 있는 조선소의 수습생으로 일한 뒤 일본 화물선을 타고 상하이, 홍콩, 동남아 등지를 항해하며 견문을 넓혔다.
일평생 '수송보국'에 바쳐…탄생 100주년 조중훈 한진 창업주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 창업…한국전쟁 등 악재에도 '신용'으로 재기
1942년 귀국한 그는 일본에서 구상한 엔진 재생 전문 자동차 수리업체 이연공업사(理硏工業社)를 설립했다. 하지만 1943년 일본의 군수지원 목적으로 회사가 편입되면서 조중훈 창업주도 사업을 접고 용산공작창에 기술 직원으로 취직하게 됐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중훈 창업주는 11월 1일 트럭 한 대로 인천에서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신념이 담긴 사명이다.

사업 초기부터 조중훈 창업주가 사업가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 것은 신용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상사는 사업 시작 5년만에 종업원 40여명, 트럭 30여대를 보유한 단단한 회사로 성장했다.

이후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한진상사의 시설은 폐허가 됐지만 그간 쌓았던 신용이 재기의 발판이 됐다. 투자자들에게 무담보로 대출 받고 예전 단골 고객들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덕분에 1955년에는 전쟁 이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다.

그러던 1956년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 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직원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이로 인해 3만달러라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지만 반대로 미군으로부터 확고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조중훈 창업주의 ‘신용’으로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따냈다. 성장세를 거듭한 한진상사는 한 해 220만달러의 외화를 벌고 500대의 보유차량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평생 '수송보국'에 바쳐…탄생 100주년 조중훈 한진 창업주
'수송외길' 원칙 지킨 조중훈…'육해공' 종합 물류기업 기틀 완성
1960년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에서도 펼쳐보기로 마음 먹었고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도 설립했지만 정부가 대한국민항공사를 전폭 지원하면서 항공사업의 꿈을 잠시 접는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0년대 말부터 사업 범주를 크게 확장시켰다.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대부분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평생 한눈을 팔지 않는 '수송 외길' 인생을 산 셈이다.

1967년 7월 자본금 2억 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세웠다. 그 해 9월에는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도 인수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대한국민항공사 후신)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우리 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인 결단이었다.
일평생 '수송보국'에 바쳐…탄생 100주년 조중훈 한진 창업주
대한항공은 정상화 과정 중 19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으로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위기에 빠진다. 당장 5000만달러가 필요했던 조중훈 창업주는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로제 총재가 흔쾌히 보증을 승락하며 조중훈 창업주의 신용의 가치가 다시 한번 빛났다.

이후 조중훈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로 향했다. 1977년 5월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1987년에는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한 후 한진해운과 합병해 인수 2년만에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다.

조중훈 창업주는 청년시설 몸담았던 조선업으로도 눈을 돌렸다.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가해 인수한 후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키는데 이르렀다.

가장 기여도 높은 사회복지활동은 인재양성…사재 털어 아낌없이 투자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이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바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취지에서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하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해, 학교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최대한 재정 지원에 나섰다.

조중훈 창업주는 “죽을 때 동전 두 닢 갖고 가는데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곳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사재를 털어가며 아낌없는 투자를 했지만 조중훈 회장은 “칭찬을 받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며 자신이 육영사업에 기울인 정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했다. 이중 500억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세 곳에 배분됐다.

"기업은 국민 경제와 조화"…국익 위해 부실기업도 떠맡아
조중훈 창업주는 평소 "사업은 예술과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기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시대로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낚시대 경영론'을 설파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진그룹은 수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업만 운영하는 종합물류그룹으로 성장해왔다.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은 ‘국민 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만 쫓기 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부실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대한선주와 같은 공기업을 인수하게 된 이유도 이런 생각이 바탕이 돼서다.


실제로 조중훈 창업주는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위한 국제 인맥을 활용해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 우리나라의 경제 및 외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같은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한 수 차례의 훈장을 받았으며 프랑스, 벨기에, 몽골, 네덜란드, 독일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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