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대한민국은 왜 마스크에 갇혔나

머니투데이 성연광 정보미디어과학부장 2020.02.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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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마스크 천지다. 버스와 지하철, KTX를 탈 때 마스크는 필수품이 됐다. 사람이 몰리는 카페나 식당은 물론 이젠 직장 사무실에서도 마스크를 쓴다. 올해 졸업식 패션코드도 마스크다. 강당에 들어가지 못한 채 가족·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훗날 졸업사진을 보며 “그때 그 망할 역병 때문에…”라고 추억하겠지.

코로나19(COVID-19)이 낳은 웃픈(?) 풍경이다. 치사율이 높았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할 때도, 미세먼지농도 수치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쓰진 않았다. 무엇이 대한민국을 마스크에 가뒀나.



#두려움

신종 바이러스가 무섭다. 대한민국을 멈춰 세웠다. 학교도 국회도 법원도 기업도 차례로 빗장을 걸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10명 남짓하던 확진자 수가 며칠 새 900명을 훌쩍 넘겼다. 한 예배당·병동에 있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감염된다. 가짜뉴스를 믿지 않지만 “너무 걱정말라”던 정부 말도 곧이들리진 않는다. 의학적 증상보다 더 두려운 건 ‘확진’ 자체다. 확진되는 순간 가족과 이웃 주민, 몸담은 직장에 엄청난 누를 끼친다. 연분이 없던 매장과 식당도 확진자가 들렀다는 이유만으로 줄폭탄을 맞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모 유명식당은 소독은 물론 수저까지 몽땅 교체했음에도 손님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만한 민폐도 없다. “걸렸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렵다.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확진자가 될 수 있다. 그 현실이 끔찍하다.



초동대처를 못해 이웃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도 적반하장인 중국 정부나 “곧 종식될 것 같다”고 했다가 열흘 만에 ‘심각단계로 격상’한 정부, 지역감염의 도화선이 된 미심쩍은 종교단체, 이 난리에 “애국 하자”며 서울 한복판에서 집회를 강행하는 다른 종교단체의 무책임한 성직자, 자가격리 수칙을 나몰라라 하는 비양심 확진자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감정이 뒤엉켜 우리를 더욱 마스크 속에 꽁꽁 숨게 한다.

#보호본능

코로나19로 우리는 서로 나와 남을 가르기 바쁘다. ‘나’는 우리나라, 우리 동네, 우리 회사, 우리 가족 등 지켜야 할 대상이고 ‘남’은 혹시 모를 바이러스 보균자다. 어쩌면 극단적 공포감이 불러낸 인간 본성일지 모른다. 얼마 전 식당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옆 테이블에 앉자마자 거부감이 들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남을 가르는 본성이 작동했나 보다. 몇 년째 다닌 회사 위탁식당에 ‘당분간 외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공지가 나붙은 건 하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나 또한 누군가의 ‘남’이 됐다.


예고도 없이 한국인 입국을 막아선 이웃 국가들에 대한 야속함은 애초 중국 전지역 입국제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부에 대한 원망과 오버랩된다. 사실 방역의 최선책은 이동을 막는 일이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건 공동체의 보호본능이다. 그래도 집단감염이 발생한 도시를 완전히 봉쇄한다는 영화 ‘감기’의 시나리오처럼 대구·경북지역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이기심의 발로다. 혐오는 또다른 혐오를 낳을 뿐이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한국인 차별처럼.
[광화문] 대한민국은 왜 마스크에 갇혔나


#배려, 그리고 희망

굳이 따지면 마스크는 바이러스가 내부로 침투하기보단 외부로 빠져나가는 걸 차단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무서운 건 무증상 감염이다. 증상 없이도 잘 옮긴다. 마스크는 입이나 코 속의 바이러스가 타인에게 튀는 걸 막는다. 적어도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불안감을 크게 덜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배려다.

방역 당국과 의료진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인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합심해야 한다. 바이러스 대응 수칙을 따르고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는 일. 코로나19 사태의 조기극복을 위한 작은 실천이다.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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