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단식 소식에 가슴이 두근"…농성장 찾아다니는 의사

머니투데이 이영민 기자 2019.12.1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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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 인터뷰 "진료실에서 환자 기다리는 건 의사 편의적 생각"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고공·단식 농성 소식이 들리면 심장이 두근거려요."

24일 동안 고공 단식 사투를 벌인 형제복지원 최승우씨, 폭염 속에서도 서울요금소 위 고공농성을 벌이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6일간 단식했던 유민아빠 김영오씨. 사회적 약자들이 부조리함에 맞서 농성을 시작하면 그들의 가족 못지않게 긴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40)은 우리나라에서 단식 농성 환자를 가장 많이 진료한 의사다. 단식·고공농성장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연락이 오면 곧장 왕진 가방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이 센터장은 "누군가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고공 농성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늘 긴장하고 있다"며 "연락이 오기 전에 먼저 연락하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 그런 체계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사회적 약자를 찾아 현장을 다니는 게 이 센터장의 주된 업무는 아니다. 평소에는 다른 의사와 마찬가지로 병동이나 진료실에서 환자를 본다. 긴급한 사고가 나면 반차를 내고 현장으로 달려가고, 왕진을 나갈 때는 업무시간 외에 주말이나 비번을 이용한다.



이 센터장은 처음 의사가 됐을 때부터 소외된 이웃을 돌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아파도 충분히 치료받지 못하거나 쉽게 치료를 포기했다가 장애가 생기거나 죽는 일이 실제로 우리 이웃들에게 일어난다"며 "비극을 조금이라도 막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0년 처음 의사가 되고 서울 내 일반 병원에서 근무할 때도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현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퇴근 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동료들과 노숙인이나 쪽방 주민, 독거노인 진료 봉사활동을 다녔다.

일반병원의 매출압박에 힘들어하던 이 센터장은 첫 일터를 떠나 공공병원인 서울시동부병원을 거쳐 2016년 녹색병원에 자리를 잡았다.


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원진직업병관리재단에서 2003년 설립한 민간형 공익병원이다. 다른 병원처럼 일반 진료를 하는 곳이지만 설립 초기부터 국가공권력 피해자 진료를 꾸준히 해왔다. 2017년 인권치유센터를 개소하면서 현장 진료도 다닌다.

녹색병원 의사 모두가 현장 진료를 나가는 것은 아니다. 이 센터장을 비롯해 현장 진료를 다니는 의료진은 4명 정도다.

이 센터장은 "아무 의료기기도 없는 현장에 청진기와 혈압기만 들고 달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의사가 많다"며 "진료실에 환자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의사의 권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의사 편의적 생각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결국 병원에 와야 제대로 된 치료가 이뤄지겠지만, 농성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의학적 충고를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며 "권위 의식을 낮추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는 의사가 많아졌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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