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갈아버린 양심, 언젠간 터진다

머니투데이 지영호 기자 2019.12.0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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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10년 전, 그러니까 결혼 직후 가사일 분담을 두고 아내와 기싸움 하던 시절이었다. 아내가 이것만큼은 못하겠노라고 선언했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음식물쓰레기 배출이다. 못 이기는 척 이걸 받고 덩치 큰 가사 두어개를 아내에게 떠넘겼다. 꽤 괜찮은 협상이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보니 이게 만만치 않았다. 걸핏하면 오수가 줄줄 새서 온 동네를 청소해야 할 때도 있었고, 버리는 과정에서 음식물이 옷에 튀기도 했다. 놔두자니 냄새가 진동했지만 냉동실에 얼렸다가 모아 버리는 방식은 찝찝해서 그만뒀다.



특히 요즘같이 날이 쌀쌀해지면 음식물 분리배출만큼 번거로운 일이 없다. 집안에서 입던 옷에 점퍼 하나 뒤집어쓰고 나갔다가 칼바람에 후회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쯤 되면 음식물처리기를 사야겠다는 충동이 솟구쳐오른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충동은 검토단계로 들어선다. 쇼핑 호스트는 디스포저 방식의 분쇄형 제품을 소개하면서 음식물을 싱크대 배수구에 쑤셔 넣기만 하면 주방일이 끝난다고 선전한다. 귀가 번쩍 트인다. 화면은 음식물로 가득 찼던 배수구가 새것처럼 깨끗해진 장면을 잡아준다. 눈이 저절로 커진다. 어느덧 홈쇼핑 예약 상담 전화번호를 남기고 있는 손을 발견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 음식물처리기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올해 3분기까지 2년 전 연매출의 10배를 넘겼다. 빨래를 널어 말리는 수고가 필요없는 세탁건조기, 설거지를 줄여주는 식기세척기, 세탁이나 다림질 수고를 덜어주는 의류관리기 등 이른바 '편리미엄(편리+프리미엄) 3대장'을 위협하는 신흥 후보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TV홈쇼핑이 보여주지 않은 비밀이 있다. 바로 분리배출이다. 어떤 제품도 음식물쓰레기 찌꺼기의 20% 넘게 하수도로 흘려보낼 수 없다. 흘려보내는 순간 불법이 된다. 달리 얘기하면 음식물쓰레기 분리배출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버리는 횟수를 줄여줄 뿐이다.

설치기사가 방문해서야 분리배출을 뒤늦게 아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한다. 여기서 새로운 거래가 생기기도 한다. 2차 거름망 설치를 생략하거나 임의로 개조한 제품을 설치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구매자는 추운 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필요가 없어지고, 설치기사는 일당을 챙기거나 실적을 쌓을 수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한 사전 규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불법설치가 이뤄져도 사적 영역인 가정집 주방을 불시 단속할 수 없는 노릇이다. 통계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유다.


얼마 전 대구의 한 아파트 1층에서 3일간 오수가 흘러넘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3일 밤낮 동안 25층에서 흘러나온 '오폐수 폭탄'을 받아냈다. 원인은 음식물처리기를 거친 음식쓰레기가 공동배관을 막았기 때문이다. 흘려버린 오폐수는 하수처리장에 부하가 걸리게 하고 수질오염을 증가시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슬그머니 흘려보낸 음식물쓰레기는 부메랑이 돼 우리 사회에 폭탄을 던져줄지 모른다. 음식물쓰레기에 양심까지 흘려보낸 건 아닌지 되짚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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