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석은 'NO약자석'?

머니투데이 박가영 기자 2019.12.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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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 박기자]교통약자라면 누구나 앉을 수 있지만…'노인전용석'된 교통약자석

편집자주 출근길 대중교통 안에서, 잠들기 전 눌러본 SNS에서…. 당신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상 속 불편한 이야기들, 프로불편러 박기자가 매주 일요일 전해드립니다.

/삽화=김현정 디자인기자/삽화=김현정 디자인기자


"나보다 젊은 언니가 여기 앉아있네?"


지하철 교통약자석에 앉아있던 김은성씨(가명·31)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김씨에 앞엔 70대로 보이는 남성이 서 있었다. 이 남성과 눈이 마주친 김씨는 "저 말하시는 거냐"고 물었다. 남성은 "맞다"고 답했다. 임신 6개월 차였던 김씨는 임산부라 앉았다고 말지만 남성은 "저기 임산부석 가서 앉지 왜 여기 앉아있냐. 비켜라"고 요구했다.

노약자석은 'NO약자석'?

지하철, 버스 안 교통약자석이 '노인전용석'이 됐다. 장애인, 임산부 등 이동이 불편한 교통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마련된 좌석이지만 고령 승객들이 자신들의 '앉을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면서다. 교통약자석이 노인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되면서 이를 두고 젊은 세대와 노년층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15조 제1항은 도시철도사업에 사용되는 전동차의 10분의 1 이상을 교통약자 전용구역으로 배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교통공사는 1~8호선 전체 지하철 좌석의 33.6%를 교통약자석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1~8호선 전동차 객실 1칸(량)마다 교통약자석 12석, 임산부배려석을 포함한 교통약자 배려석 7석을 설치돼 있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 마련된 교통약자석은 명칭 그대로 '교통약자'들을 위한 자리다. 1980년에 도입된 노약자석은 2005년 '교통약자석'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노인뿐 아니라 임산부, 장애인, 아이를 안은 부모, 환자 등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통약자석이 경로석이라는 인식이 강한 탓에 노인들을 제외한 교통약자들은 자리에 앉지 못하거나 앉더라도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다.



직장인 조서연씨(31)는 "교통약자석에 지체장애인으로 보이는 20대 남성과 그분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한 분이 그 앞에 서더니 '장유유서도 모르나'라고 소리쳤다. 당연히 배려받아야 하는 교통약자였지만, 어머니는 '애가 몸이 불편한 애예요. 죄송해요'라고 오히려 사과했다"고 전했다.

직장인 한영준씨(32)는 "얼마 전 할아버지 한분이 지하철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분에게 '일어나라'고 큰 소리 내는 걸 봤다. 여성분은 다리를 다쳤는지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눈치를 보더니 마지못해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앉았고, 여성분은 목적지까지 서서 갔다"며 "노인들은 교통약자석을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의 자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괜히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서 진짜 아플 때도 교통약자석엔 절대 안 앉는다"고 말했다.

지하철 교통약자석 픽토그램. 임산부와 유아동반 표시에 'X'자가 그려져있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지하철 교통약자석 픽토그램. 임산부와 유아동반 표시에 'X'자가 그려져있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교통약자석을 노인전용석으로 생각하는 노년층과 교통약자라면 누구나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 간 갈등도 적지 않다.


취업준비생 이미소씨(가명·28)는 "발목이 너무 아파서 지하철 교통약자석에 앉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여기 왜 앉아 있냐고, 장애인증 있냐고 대뜸 따져 물었다"며 "사정을 설명해도 '양심 없는 X'이라고 욕을 해서 나도 같이 언성을 높였다. 나중엔 가정교육 어떻게 받은 거냐며 부모님 욕도 하더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했다.

관련 민원도 크게 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노약자석 관련 민원 건수는 2017년 39건에서 2018년 93건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지난 10월까지만 114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고령 승객 사이에서도 교통약자석에 대한 의견이 나뉜다. 한양수씨(74)는 "교통약자석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앉아야 하는 자리"라며 "노인들이 일반석에 가면 젊은 사람들 표정 안 좋아지지 않냐. 여기도 앉지 마라, 저기도 앉지 마라 하면 어떡하라는 거냐"고 반문했다.

최영순씨(72)는 "지하철에서 어떤 양반이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여자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걸 본 적 있다"며 "임산부라고 해도 '여기 앉으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 내가 맞은 편에 앉아있어서 그 양반한테 임산부도 앉을 수 있고 젊은 사람도 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라고 되레 화를 내더라"고 전했다.

젊은 세대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고령 승객들이 자리 양보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대학생 김재웅씨(가명·23)는 "교통약자석은 젊은 사람들이 앉으면 절대 안 되는 곳이 됐고, 일반석도 노인들이 오면 무조건 양보해야 하는 자리로 인식된다"며 "돈을 내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이 무료로 이용하는 노인들에게 자리까지 내줘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교통약자석 이용과 관련해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전동차 내 교통약자석은 노인부터 어린이, 부상자,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승객까지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라며 "하지만 이와 관련한 인식 개선이 더딘 것이 사실이다. 공사는 역사 안내방송, 전동차 내 동영상, 캠페인 등으로 배려 문화를 확산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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