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9.08.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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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고영민 시인 ‘봄의 정치’

[시인의 집]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고영민(1968~ )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봄의 정치’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오래 고여 있던 슬픔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것을 시로 승화시켰다. 죽음은 한 생애와의 이별을 뜻하지만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닌 ‘나’를 거쳐 ‘자식’으로 대(代)가 이어지는 통과의례다.

결혼 후 같이 사는 가족, 특히 아이들도 부모 형제만큼 소중하기에 시인은 봄의 희망을 노래한다. 시에 종종 등장하는 저녁은 세월의 흐름을 인지한 시인의 현재 시간, 피었다가 금방 지고 마는 여러 꽃들은 삶과 죽음의 존재론을 되새기는 사유의 대상이다.



자고 일어난 지가
한참인데
얼굴에 베개 자국이 남아 있어

아직 잠 속에 있는 걸까, 나는
환한 낮을 곁에 두고



식탁에 밥을 퍼다 놓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움푹 들어간 베개를 자꾸만 고쳐 베어야 하는
이건 너무 큰 어둠이어서

이마와 뺨 한쪽
베개 자국을 두른 채

나는 어쩜 잠 속에서 태어난 사람
잠의 말을 듣고
잠의 말을 전하는


어둠은 구절초 말린 것과 메밀껍질로 속을 채워넣었으니,
베개처럼
푹신해서

- ‘얼굴에 남은 베개 자국’ 전문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봤는데 “얼굴에 베개 자국”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건 나이 듦의 확인이다. 피부가 탄력적이던 젊은 시절에는 금방 사라지던 살 자국이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탄력을 잃은 것은 살만이 아니라 마음도 물렁해져 “마루에 앉아 여름비”를 보다가 “그리움 한단” 들이고는 혼자 “훌쩍훌쩍 울고”(‘아무도 없는 현관에 불이 켜지는 이유’) 있다.

실제의 잠일 수도 있겠지만, “자고 일어난 지가/ 한참”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지 꽤 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잊지 못하고 밤에 뒤척이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깊다는 의미다. 만약 편안하게 누워 잠을 잤다면 “이마와 뺨 한쪽”에 베개 자국이 남아 있을 까닭이 없다. 한밤에 문득 깨어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면서 “움푹 들어간 베개를 자꾸만 고쳐 베”고 끅끅 울었을 것이다.

‘잠’은 결혼 후 떨어져 살다 끝내 다시 볼 수 없는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며, ‘어둠’은 시인의 슬픔이라 할 수 있다. 가깝게는 “시집을 묶는 동안 돌아가”(‘시인의 말’)신 어머니와 한가위마다 “마루에 앉아 송편”(‘송편’)을 빚었던 아버지와 “어릴 때 경운기에서 떨어져/ 다리 수술”(‘철심’)했던 죽은 형에 대한 그리움이다. 반면 곁에 두고 있는 “환한 낮”은 현재 함께 사는 가족이다. 불안과 허무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죽음에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

- ‘적막’ 전문


군자란이 꽃을 피우지 않아도 봄은 오지만 꽃이 없는 봄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군자란의 “잎새 사이”로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은 꽃의 길이면서 봄의 길이다. 꽃과 봄이 합일을 이루는 따스하고도 촉촉한 공간이다. 매년 피던 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의 예감이다. 합일의 공간이 이별의 공간으로 변한 것은 “물을 많이 줘서 죽”(‘베고니아’)는 베고니아처럼 지나친 관심이나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있는”(‘나이든 개’) 늙은 개처럼 자연사를 떠올릴 수 있다.

봄이 탄생이라면 겨울은 죽음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면 “멀고도 아득한 길”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애이면서 그 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다. 한 뿌리에서 나서 같은 땅을 밟고, 한 우물물을 마신 가족이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가는 상황에 시인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거둔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이하 ‘봄의 정치’)는 희망과 “새 학기를 맞”은 사랑하는 “나의 딸들”이 있기 때문이다.

탱자나무 생울타리에
노란 탁구공들이 박혀 있다

누가 있는 힘껏 스매싱을 날렸는지
네트 한가운데
공은 깊숙이도 박혀 있다

가시에 찔리며
겨루었던
너와의 길고도 힘겨웠던
맞-드라이브

5월의 탱자꽃 시절

아무리 조심해도 너에게 손을 넣을 땐
매번 손등을 긁혔다

- ‘네트’ 전문


시인은 지금 “갓 만든 저녁”(‘두부’)의 시간을 살고 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이하 ‘저녁으로’) “어두워져가는 저 길 끝”으로 누군가 올 것만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젊은 엄마”(‘내가 어렸을 적에’)를 생각하다가, 급기야 “5월의 탱자꽃 시절”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떠올린다. “사랑은 저렇게 꽃의 얼굴을 하고”(‘꽃의 얼굴을 하고’) 찾아와 애간장을 태우던 시절의 사연이다.

시 ‘네트’는 탱자나무에 열려 있는 탱자를 탁구 네트에 박힌 탁구공으로 환치시킨다. 잎이 다 지고, 탱자가 노랗게 익는 계절은 9월 말 이후다. 하루 24시간을 한 생으로 친다면 저녁의 시간이다. “너와의 길고도 힘겨웠던” 연애, 매번 “가시에 찔리”면서도 아픈 줄도 몰랐던 젊은 날의 사랑.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매번 손등을 긁”혀 결국 헤어지고 만다. 탱자나무의 잎이 다 져 가시가 잘 드러나는, 즉 세월이 흘러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잡아줄 손이 곁에 없다.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자국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봄의 정치=고영민. 창비. 128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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