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미지투데이
11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총 1만5689명이다.
◇종로 곳곳에 얽혀 있는 독립운동사(史)
보신각 앞에 자리하고 있는 3,1독립운동기념터 표석./사진=이호길 인턴기자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1일 학생들이 이른 새벽부터 독립선언서를 시내에 배포하며 시작됐다. 학생들은 정오부터 탑골공원으로 모여들었고, 33인의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후 군중은 보신각에서 일제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은 보신각종을 울렸다. 타종을 시작으로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벌였고, 서울 시내는 만세를 외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이를 통해 보신각은 탑골공원과 함께 3.1운동의 발상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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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보신각은 3월5일 학생단 주도로 열린 제2차 대규모 시위에서 독립 연설회가 열린 곳이다. 3월9일 상인들의 동맹 철시(撤市·시장이나 점포의 문을 열지 않는 일)가 단행된 중심지이자 4월23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국민대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이같은 3.1운동은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됐다. 이 운동의 주역은 보신각 주위에서 만세를 외친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보신각 앞에 놓인 한 장의 표석으로 남아있다.
종로에 자리하고 있는 김상옥 의거 터 표석./사진=이호길 인턴기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김 의사는 1923년 1월12일 종로경찰서 투탄(投彈) 의거를 벌였다. 이로 인해 경찰서 서편 사무실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자 김 의사는 현재의 용산구 후암동에 위치한 매제 고봉근의 집으로 몸을 숨겼지만, 이내 수백명의 경찰이 이곳을 포위했다.
김 의사는 1월17일 총격전 끝에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남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월22일 효제동에서 다시 쫓아온 1000명의 경찰을 홀로 맞닥뜨렸다. 김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결연하고 당당하게 항거했다. 3시간 동안 교전을 벌이며 여러 명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적이었고, 이윽고 탄환이 바닥났다. 김 의사는 최후의 탄환을 자신의 가슴에 조준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김 의사가 일본 경찰과 의연하게 대항하던 모습은 2016년 개봉해 7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밀정’에서도 그려졌다. 영화 초반부에 쌍권총을 들고 싸우던 ‘김장옥’(박희순 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바로 김 의사다. 정부는 1962년 김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을지로에 자리하고 있는 나석주 의사의 동상./사진=이호길 인턴기자
보훈처에 따르면 나 의사는 1926년 6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 선생의 요청으로 경제적 착취의 대표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같은 해 12월28일 거사를 일으켜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폭탄을 한 개씩 던졌다.
그러나 두 개의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쳤다. 이에 나 의사는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철도회사로 들어가 총격을 가해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사살했다. 경찰대와 기마대가 출동하자 그는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정부는 나 의사의 공적을 인정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거지에 동상도 건립됐다. 나 의사는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거리 한편에 늠름하게 서 있다.
◇이들에 대해 물었더니 "잘 모르겠어요"…독립운동가 교육·홍보 강화해야
보신각./사진=이호길 인턴기자
이날 보신각 주변에서 만난 30대 직장인 정모씨는 “직장이 이 근처라 거의 매일 지나가는데, 3.1운동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고 밝혔다. 이어 “보신각에 얽힌 역사적인 의미는 잘 모르겠다. 그냥 유서 깊은 조선시대의 건물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김상옥 의사와 나석주 의사의 의거지 근처에서 만난 시민의 반응도 비슷했다. 대학생 윤모씨(22)는 “솔직히 두 분에 대해 잘 몰랐다. 종로에서 약속이 생기면 자주 오는데, 주의 깊게 안 봐서 그런지 표석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며 “바쁘게 살다 보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부를 시간 내서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는 한두 명이 아니다. 국내가 아니라 일제의 압제를 피해 해외에서 활동한 인물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거점이었던 중국이나 만주·연해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했다.
조명하 의사(좌측)·백정기 의사의 생전 모습./사진=조명하의사 기념사업회·전주방송 유튜브 캡처
이들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에 백정기 의사의 며느리인 양순애 여사(85)는 백 의사의 인지도가 낮다는 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양 여사는 광복절인 지난 15일 방송된 KBS의 한 프로그램에서 “(백 의사가) 엄청난 일을 하시려고 계획은 했지만, (밀정이) 밀고를 했기 때문에 사전에 발각돼 성공을 못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래서 (백 의사가) 잘 안 알려진 것 같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 반드시 (거사를) 성공한 사람들만 나라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5일 오전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정부 경축식'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사진=천안(충남)=사진공동취재단
이를 위해 방 실장은 독립운동가 교육 분산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관련 내용이 국가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평생교육진흥원 등으로 산재해 있다"며 "학생에게 교육하는 내용도 교육부와 교육청, 지자체마다 다르다. 통합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기억하는 일은 국가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헌법정신에도 부합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방 실장은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나와 있다"며 "법률로 헌법 전문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후속 사업과 기구 등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