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사진=AFP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 등 78명이 '한국은 적인가'라는 제목으로 낸 공동성명 조회수는 지난 8일 자정 기준 22만 건을 넘었고 서명에 동참한 인원은 7701명(기명 5304, 익명 2397명)에 달할 정도로 일본 내 작은 울림으로 번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10월8일 국회 연단에 서서 "한일 양국은 1500년 이상이나 되는 교류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비해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20세기초) 식민지배 35년"이라며 "이렇게 50년도 안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의 한일 관계 재정립에 대한 강한 의지는 곧바로 '한일 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외교부의 '김대중 대통령 일본 공식방문 결과'에 따르면 당시 4년 뒤 있을 2002년 월드컵의 성공을 위한 양국 국민의 협력을 지원하는 한편 △양국간 대화채널 확충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협력 △경제분야에서의 협력관계 강화 △범세계적 문제에 관한 협력 강화 △국민교류 및 문화교류의 증진 등 굵직굵직하고 다양한 의제들에 관해 합의점들을 내놨다.
양국 사이가 좋던 때에 나온 선언이 아니어서 더욱 높이 평가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격앙된 발언을 내놓을 만큼 당시 한일 관계도 독도, 위안부 문제 등을 놓고 첨예하게 갈리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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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와중에 대승적 자세로 일본에 다가가 화해의 뜻을 보인 김 전 대통령의 배포만큼이나 주목받았던 것이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의 통 큰 화답이었다. 두 사람이 맞손을 잡지 않았다면 한일공동선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부치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방일 당시 기자회견 모두 발언에서 "양국관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저는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우리 나라가 과거의 일정 기간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 지배에 의한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습니다"라고 밝혔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로서의 일본이 피해 국가로서의 '한국', 그리고 '사죄'와 '반성'이란 단어를 직접 언급했단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인에, 오부치 전 총리는 한국인에 큰 감동을 줬다. 현재까지도 일본의 한국을 향한 사과의 메시지는 이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김 전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특별수행원으로 동행했던 최상용 전 주일대사는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질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앞선 내용이었다"며 "(1995년 나온)무라야마 담화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1998년 10월 일본 오사카에서 한일공동선언을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오른쪽)/사진=AFP<br>
1937년생으로 와세다대에서 영문학 학사,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63년 일본 참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는데 이후 일본 관방장관, 일본 자민당 간사장, 일본 자민당 부총재, 일본 외무상 등을 지냈다.
총리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직으로 여겨졌던 경제관료를 지내지 않은 탓에 인지도가 낮았다. 총리가 되기 전 가장 크게 집중받은 것이라고는 관방장관이던 시기로 당시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간 때 새 연호를 들고 있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됐을 때다. 뿔테 안경에 푸근해 보이는 인상으로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란 별명을 얻었다.
1998년 7월30일 일본의 84대 총리로 취임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그에 대해 '식은 피자'라 칭했다. 3일이면 오래간것이란 의미의 혹평이었다. 이같은 혹평에 오부치 총리가 '식은 피자도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맛있다'고 응수하며 기자들에게 직접 피자를 돌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자민당과 자유당의 연정을 이루고 그의 소탈한 성품이 차츰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점차 인기도 높아졌다. 소탈했던 성품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부치폰'이다. 자민당 의원들은 물론 저널리스트, 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고교생 등 국민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오부치입니다"라고 대화를 시작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홈페이지
일본 언론 FNN에 따르면 총리 재직 당시 그의 비서실에는 총리 점심식사로 늘 샌드위치와 자루 소바가 놓여 있었는데 그가 대식가여서가 아니라 너무 바빠 오전에 비서가 점심 메뉴를 물어볼 시간이 없어서였다. 매일 두 종류의 메뉴를 준비해 둔 뒤 점심시간에 선택을 받는 식이었는데 그마저도 건너 뛰는 때가 종종 있었다.
관저에서 취침시 버릇은 남성용 속옷 위에 일반 셔츠를 입은 채 잠드는 것이었다. 한밤 중 긴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과로에 시달렸던 그는 2000년 4월 과로로 인한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업무로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같은 해 5월, 62세의 이른 나이에 별세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에 대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친구이자 한일 우호협력 관계의 새 시대 구축에 공헌했다"는 말을 남겼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그에 대해 "나는 오부치 전 총리를 좋아했는데 그라면 혼란스러운 일본의 정치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송기도 교수 등이 세계 지도자들의 면모와 리더십 비결에 대한 정리한 책 '권력과 리더십'(인물과 사상사 펴냄)을 보면 오부치 전 총리의 취미는 '소 장식물' 수집이었다. "나는 느린 소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려 애써왔다"며 생전 수천 여 점의 소 장식물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25세 때는 접시닦이, 합기도 조교, 카메라맨 조수 등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38개국을 9개월간 여행했는데 당시 동서냉전의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정치인생에 큰 자산이 됐다고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