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찍고, 돈 노래하는 시인

머니투데이 한고은 기자 2019.07.3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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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이정욱 한국은행 발권국장…·원(₩)과 파운드(£) 등 각국 화폐로 시집 엮어

이정욱 한국은행 발권국장이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한은 강남본부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시와 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한고은 기자이정욱 한국은행 발권국장이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한은 강남본부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시와 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한고은 기자


시인과 돈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이 이코노미스트라면 어떨까. 한국은행 발권국 이정욱 국장은 올해로 입행 27년차 금융인이면서 지난해 '봄 만남, 겨울 이별의 시와 사색'이라는 첫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하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고위정책과정에 참여해 사계절을 보내면서 느낀 감상을 시로 풀었다.

올 초 한은에 복귀한 이 국장은 이번엔 좀 더 색다른 시를 써보기로 했다. 돈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반년 간 써 내린 시들은 9월 '화폐 제국의 숨결(가칭)'이라는 두 번째 시집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지난 29일 한국은행 강남본부에서 만난 이정욱 국장은 돈 얘기를 낭만적으로 풀어냈다. 이 국장은 "시를 쓰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다"며 "거기서 생긴 새로운 긍정 에너지로 삶을 채우는 기쁨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시집은 발권국 동료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썼단다. "비현금결제수단 사용이 늘면서 화폐의 종말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발권국 사기가 떨어졌다"며 "화폐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문화, 예술적 향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시는 '유로화의 창문'이다. 유로화 은행권에 담긴 창문과 다리 그림에서 '연결과 포용'을 읽었다. "하나 될 수 있는 평온한 마음과 꽃을 사랑하는 평화가 누구랄 것 없이 자연스레 솟아오를 때는 닫힌 창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썼다.

시를 감상한 동료들과 소통하면서 '화폐정사원'이란 호칭을 다시 생각해볼 계기도 생겼다. 화폐정사란 한은에 들어온 돈들의 상태를 확인해 쓸 수 있는 돈과 못 쓰는 돈으로 구분하고, 위조 여부 등을 가리는 일이다. 화폐를 '정리하는 사람'이라는 명칭은 너무 단순했다.

이 국장은 "이번 하반기 정기인사에 맞춰 관련국에 명칭 변경을 요청했고, 규정을 바꿔 앞으로 '화폐관리원'으로 칭하기로 했다"며 뿌듯해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시로는 영국 파운드화를 모티브로 한 '당신의 자리'를 꼽는다. 총 33개 작품 중 가장 마지막으로 쓴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지난 15일 최고액권인 50파운드 은행권의 얼굴로 수학자이자 인공지능 기술 선구자인 엘런 튜링을 선정했다.

이 국장은 "엘런 튜링은 동성애자로 낙인찍혀 경찰에 체포당하고, 화학적 거세를 당한 후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50파운드에 그 얼굴을 넣는다는 건 영국이 그만큼 다양성을 포용하는 나라이면서 그의 삶이 복권됐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27년 커리어 대부분을 조사국과 국제국에서 일하면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 국장은 이코노미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최근에는 발권국장을 맡아 돈의 흐름 뿐만이 아니라 실물화폐 그 자체를 사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국장은 "지난해 통신사 전산망 화재로 결제 금융망이 마비됐을 때 현금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며 "실물화폐는 '올 오어 나씽(All or Nothing)' 문제가 아니기에 어느 정도 남겨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최고액권 5만원권을 발행한 지도 10년이 지나 위변조 방지 기술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정욱 국장은 대한민국 원화를 주제로 한 시의 제목을 '둥글게 둥글게'로 붙였다. 그는 "돈이 잘 돈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돈이 잘 돈다는 것"이라며 "우리 경제도 더불어 함께 가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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