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세상에 고치를 남기고 나비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

머니투데이 김영권 작은경제연구소 소장 2019.06.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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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에세이] 내 영혼의 문장들 –29 / 이승을 떠나면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죽음이란 세상에 고치를 남기고 나비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고치(몸)가 회복 불능 상태가 되면 나비(영혼)가 태어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그녀의 별명은 ‘죽음의 여의사’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죽음 곁에서 죽음을 연구했다. 평생 호스피스 운동을 펼치면서 죽어가는 자를 돌보고, 죽음학을 정립했다. 말년에는 중풍으로 9년을 반신불수로 지내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죽음을 맞보았다.​



2004년 8월 그녀의 장례식. 아들과 딸이 그녀의 관 앞에서 하얀 상자를 연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몸을 떠난 그녀의 영혼이 팔랑팔랑 춤을 춘다. 동시에 참배객들이 작은 종이봉투를 연다. 수많은 나비들이 너풀너풀 날아오르며 그녀를 배웅한다. 은하수로 춤추러 간 그녀를 축하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 생애를 졸업하는 날, 난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러니 그날은 축하를 받아야 할 날이지요.”



그녀에게 죽음은 ‘이 세상에 고치를 남기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이었다. 갑갑한 몸을 떠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죽음은 없었다. 죽음 전의 생과 죽음 후의 생만 있었다. 오직 변화만 있었다. 그녀는 말한다.

“죽음이란 나비가 고치를 벗어던지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당신이 계속해서 성숙할 수 있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육체다. 육체는 더 필요하지 않다. 마치 봄이 와서 겨울 코트를 벗어버리는 일과 같다. 당신은 그 낡은 코트를 더는 입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죽음이 가진 모든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나 또한 죽으면 고치를 벗은 나비처럼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봄 햇살에 겨울 코트를 벗어던진 아이처럼 신났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갑자기 죽음이 덜 무서워진다. 덜 무거워진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여는 미지의 문일 뿐이니까.


퀴블러 로스는 죽음 뒤에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앎의 문제이지 믿고 안 믿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나도 이런저런 믿음으로 죽음을 예단하지 않으리라. 죽음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삶의 진실에 충실하리라. 퀴블러 로스는 일흔에 쓴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연구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핵심은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오직 잘 살아야 한다. 죽음 뒤에도 삶이라면 나에겐 언제나 잘 사는 일밖에 없다. 죽음 뒤에 삶이 없다면 나에겐 더더욱 잘 사는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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