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초연결통신연구소에 설치된 ‘초실감 가상훈련시스템’ 훈련돔(가로×세로, 2.4m×2.4m) 안에서 시연을 보이던 연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갑자기 큰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VR(가상현실) 장면은 총격전이 발생한 사막 전장에서 시연 담당 연구자가 바로 앞에 있는 은폐물로 몸을 숨기지 않은 채 계속 서서 쏴 자세로 대응사격을 가하자 이를 지켜본 정 장관이 불안하고 답답하다는 듯 던진 말이다.
최근 전세계적 전투 발생 추세는 대테러전이나 해적 진압, 인질 구출 작전 등 소규모 부대 작전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에 따라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작전지역을 위성영상 등의 정보를 모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 가상공간을 구축하고 이곳에서 병사들에게 실전과 같은 훈련을 실시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류준영 기자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초연결통신연구소에 설치된 ‘초실감 가상훈련시스템’ 훈련돔에서 가상의 전술 훈련 시뮬레이션을 체험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ETRI
적진을 향해 낮은 포복으로 접근했다. 구덩이가 깊게 좌우 지그재그로 팬 구간에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전력질주로 적의 방어진지에 도달하기까지 기자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기자의 몸은 돔 내부 바닥 정중앙에 그대로 있었다. 박상준 ETRI 국방ICT융합센터 책임연구원은 “훈련자가 뛰고 달리는 속도변화와 방향 등을 자동감지해 항상 러닝머신 중심에 머물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360도로 작동하는 바닥시스템은 한국기계연구원과 공동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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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을 머리 위로 향해 뭔가를 던지는 시늉을 하면 수류탄을 투척하는 모습이 화면에 연출됐다. 육탄전 상황에 맞닥뜨려 허벅지에서 칼을 꺼내는 시늉을 하면 영상에선 대검을 꺼내든 모습이 나타났다. 박상준 책임연구원은 “AI(인공지능) 머신러닝(기계학습)을 통해 훈련자의 행동을 분석했다”며 “훈련자가 앞으로 권총을 쏠지, 대검을 뽑을지, 수류탄을 던질지는 AI가 훈련자의 사전동작을 빠르게 읽고 판단해 화면에 보여준다”고 말했다. ETRI 연구진은 AI에게 보다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해 이용자 몸에 다중모션 센서를 부착, 총 20개 이용자 관절 위치 및 움직임을 감지해 걷기, 뛰기, 앉기, 일어나기 등의 움직임을 정밀 파악했다. 현재 총 29가지 이상 행동을 인식할 수 있다. 박 책임연구원은 “소총이나 권총 같은 무기에 마커를 부착하면 탄착지점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건물 사이를 이동하며 적군과 교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돔 외부에선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사하셨습니다. 나오세요.” 2분이 채 안된 시간이었지만 온몸은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류준영 기자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초연결통신연구소에 설치된 ‘초실감 가상훈련시스템’ 훈련돔에서 가상의 전술 훈련 시뮬레이션을 체험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ETRI
이같은 군용 가상훈련시스템은 현재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기술선진국에서도 앞다퉈 개발·도입하는 추세다. ETRI에 따르면 초실감 가상훈련시스템은 2015년 미군의 훈련시스템을 총괄하는 미 육군연구소에서 공동연구를 요청했다. 이어 지난해 4월 미 육군이 특수부대 전략화 가능성 점검을 위한 시험평가용으로 도입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상태다.
이 기술은 전투병 훈련 외에 예비군 훈련, 실감형 스포츠, 재활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 가능하다. 실제로 ETRI 연구진은 이를 차세대 예비군 훈련시스템(2020~2023년)으로 확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박 책임연구원은 “예비군들이 재미있게 훈련받을 수 있는 신개념 훈련시스템을 제작해 훈련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TRI는 전세계 가상훈련시장이 2020년 약 11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초실감 가상훈련시스템 훈련돔을 컴퓨터로 디자인한 모습/자료=ETRI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은 “첨단기술 기반의 미래전장에서 혁신적인 미래 국방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민간의 우수한 R&D(연구·개발) 역량을 국방과 연계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