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안보이는데 야구 직관이 가능할까요?"

머니투데이 이영민 기자 2019.05.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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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안제영씨 나홀로 KBO 직관 관람기…"안내 가능하냐" 질문에 "규정 없어 어렵다" 답변

안제영씨(오른쪽 끝 흰 우비) 지난달 26일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 베어스 경기를 보던 중 롯데의 득점에 기뻐하고 있다. /사진=이영민 기자안제영씨(오른쪽 끝 흰 우비) 지난달 26일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 베어스 경기를 보던 중 롯데의 득점에 기뻐하고 있다. /사진=이영민 기자


"제가 혼자 왔는데요. 앞이 잘 안 보여서요. 이따 일어나서 응원할 때 말씀 부탁드려요."

지난달 26일 오후 한국프로야구(KBO)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베어스 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시각장애인 안제영씨(24)가 옆자리 관객에게 말했다. 안씨는 이날 경기장을 홀로 찾았다. 친구들과는 야구 경기 직관(직접 관람)을 여러 번 했지만 혼자 온 건 처음이었다.

옆 관객에게 미리 도움을 청한 건 응원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사전 준비였다. 질문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상태를 아는 사람을 확보해놓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안씨는 첫 나홀로 직관을 앞두고 사전 준비를 꼼꼼히 했다. 표 예매는 지인의 도움을 구했다. 시각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야구경기 예매 사이트 탓이다. 지하철역에서 경기장까지, 매표소에서 출입구까지 거리 등 경기장 정보도 기록했다. 야구 직관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인 '먹거리' 정보는 검색과 지인 추천을 통해 챙겼다.

준비 마지막 단계로 전화로 미리 도움 요청을 시도했다. 잠실경기장 홈팀인 두산베어스 측에 전화해 "시각장애인이 혼자 가면 안내가 가능하냐"고 문의했으나 "매표소에 와서 직접 부탁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방문 시간을 정하면 매표소 직원에게 미리 전달해줄 수 있냐"는 요청도 "규정이 없어서 어렵다"며 거절당했다.



안씨가 경기 시작 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왼쪽), 안씨가 앞좌석 관객들과 손을 잡고 롯데의 득점에 즐거워하는 모습. /사진=이영민 기자안씨가 경기 시작 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왼쪽), 안씨가 앞좌석 관객들과 손을 잡고 롯데의 득점에 즐거워하는 모습. /사진=이영민 기자
결국 안씨는 불확실성을 떠안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몰릴 시간을 피해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종합운동장역 5번 출구에 도착했다. 안씨가 출구에서 30초 거리에 있는 매표소를 찾아 헤매고 있으니 근처에서 치킨을 팔던 노점상 아주머니가 매표소까지 안내했다.

안씨는 매표소 직원에게 안내할 직원이 있는지 물었으나 "인력이 없으니 출입구에 가서 구단 측 직원에 얘기하라"는 답을 받았다. 안씨는 매표소 근처를 지나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가장 가까운 출입구까지 안내를 부탁했다.

출입구에 도착해 한 번 더 안내를 요청해 안씨 좌석 구역 담당 경호원을 만날 수 있었다. 3번의 요청과 2번의 거절, 2번의 시민 도움 끝에 얻은 '이동권'이었다.


안씨는 구단 측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산 닭강정과 과자, 음료를 한가득 안고 예매한 자리로 이동했다. 경호원에게 5회말 쉬는 시간에 화장실 이동과 경기 후 지하철역까지 동행을 미리 부탁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호원의 전화번호도 받아놨다.

가장 어려운 일이 끝나고 경기를 즐기는 일만 남았다. 안씨는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경기 생중계를 들었다. 다른 한쪽 귀는 열어두고 응원단장의 구호에 귀 기울였다. 롯데 자이언츠의 열혈팬인 그는 "안타 안타 쎄리라 쎄리라", "승리를 외치자" 등 구호를 외치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안씨는 옆자리에 앉은 관객에게 상황 설명을 부탁하기도 하고 같이 경기 내용에 푸념도 하면서 경기를 즐겼다. 8점이나 뒤지던 롯데가 9회에만 5점을 뽑자 주변 관객들이 안씨의 손을 맞잡고 함께 기뻐했다.

안씨가 경기가 끝난 뒤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이영민 기자안씨가 경기가 끝난 뒤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이영민 기자
경기가 끝난 뒤 안씨는 경호원에 전화해 다시 안내를 요청했다. 경호원의 도움으로 자리 주변 쓰레기를 모두 정리한 뒤 지하철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안씨는 올해 1~2차례 더 혼자 직관을 다녀올 생각이다. 첫 홀로 직관에 성공하며 자신감도 생겼다. 시각장애인들이 만든 야구 팟캐스트 '듣는 야구'에 출연 중인 그는 많은 시각장애인 야구팬들에게 "전맹 장애인 혼자 야구장에 가는 건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됐다며 안도했다.



아쉬움도 남았다. 안씨는 "매뉴얼이 없다보니 개인의 용기와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했다"며 "시각장애인 안내 매뉴얼이 생겨서 시각장애인 친구들끼리도 안전하게 야구를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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