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여자선언서. /사진=여성가족부,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여성가족부,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1919년 2월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3·1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임진왜란 때 진주의 논개, 평양의 화월을 본받아 민족 독립을 향해 행진하자고 촉구했다. 다른 독립선언서와 달리 순한글로 작성됐다.
인도 독립운동가 자와할랄 네루는 3·1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인도에는 왜 한국의 여학생처럼 용감무쌍한 소녀들이 없을까"라며 이역의 여성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뜻을 보냈다고 한다.
김경희는 숭의여학교 교사로 송죽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지리 수업 중 '하얼빈' 지명이 나오자 일제의 감시에도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쾌살한 곳"이라고 설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비행 준비중인 권기옥(왼쪽 두번째)와 동료들. /사진=여성가족부,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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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임산부의 몸이었던 안경신은 과일 장수로 위장해 폭탄 2개를 광주리에 넣고 평남도청에 투하했다. 안경신은 이 일로 징역 10년의 옥고를 치른다.
오광심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으로 기관지 '광복'을 통해 선전활동을 펼쳤다. 민영주 역시 심리작전 요원으로 활동했다. 민영주는 생존해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3명 중 한 명이다.
지복영은 일본군 접경지에 대원을 모집하고 군사전략을 세워, 박차정은 의열단원과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박차정은 1939년 곤류산 전투에서 당한 부상으로 서거했다.
조마리아(안중근), 곽낙원(김구)는 독립운동가 아들을 길러냈다. 1910년 조마리아가 변호사 교섭을 위해 평양에 왔을 때 아들의 삶을 쭉 읊자 일본 순사와 헌병은 "범이 범을 낳았다(그 어머니에 그 아들)"고 감탄했다.
가문을 돌볼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들도 있었다. 허은은 농사일과 독립군 접대 등을 도맡으며 독립운동 명가 허위, 이상룡 집안을 지켜냈다.
김락은 퇴계 이황 가문에서 내려오는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전념하도록 뒷바라지했다. 김락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도 꿋꿋한 내조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멕시코, 쿠바 등 미주지역 여성들이 모인 대한여자애국단, 미국 하와이에서 결성된 대한부인구제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부인독립회 등은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여가부는 지난달 여성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담은 여성 독립운동가 달력을 제작했으며, 부처 홈페이지를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 알아보기 이벤트도 진행중이다.
'여성독립운동가, 미래를 여는 100년의 기억' 특별기획전. /사진=여성가족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