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관광지 울룰루에 서린 눈물… "나는 2등 시민"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2019.02.1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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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②] 호주 백인, '백호주의'와 '테라눌리우스' 등 원칙으로 원주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 최근 아시아태평양 국가로서 변화 노력

호주 울룰루 /사진=위키커먼스호주 울룰루 /사진=위키커먼스


2012년 1월27일,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재미있는 물건이 매물로 올라왔다. 짝을 잃은 구두 한 짝이었다. 스웨덴 가죽 제품인 네이비블루 컬러의 이 신발은 처음 148호주달러(약 12만원)에 올라왔으나 점차 올라 2000호주달러(한화 160만원)까지 치솟았다. 이 신발의 주인공은 줄리아 길라드 당시 호주 총리(제 14대 총리, 임기 2010년 6월24일~2013년 6월26일)다.

이 신발은 길라드 전 총리가 수도 캔버라에서 열린 '자랑스런 호주인' 행사에 참가했다가 자신들을 차별한다며 항의하는 원주민 시위대들에게 쫓겨 황급히 달아나면서 벗겨진 하이힐 한 짝이었다. 물론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이 신발은 25분만에 경매 목록에서 내려갔다. 경매 원칙상 소유자가 직접 매물 목록에 올리거나, 아니면 경매를 허락한 경우에 한해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베이 대변인은 "우리는 그 신발의 주인이 총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당사자가 판매를 허락한다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록에서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길라드 전 총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길라드 총리는 전날인 2012년 1월26일, 호주 건국기념일인 '호주의 날'을 맞아 캔버라 호주 의회 근처 식당에서 호주의 날 기념메달 수여식을 가졌다. 하지만 200여명의 원주민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여 대피해야만했다. 시위자들은 이날 '원주민 천막대사관'(Aboriginal Tent Embassy)에서 천막대사관 설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다가 길라드 전 총리의 행사장에 가서 이 같은 항의 표시를 했다.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가 2012년 1월26일 '호주의 날'을 맞아 캔버라 한 레스토랑에서 열린 긴급 구조원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을 갖는 동안 200여명의 원주민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대피하고 있다. 시위자들은 이날 '원주민 천막대사관'(Aboriginal Tent Embassy)에서 천막대사관 설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사진=뉴시스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가 2012년 1월26일 '호주의 날'을 맞아 캔버라 한 레스토랑에서 열린 긴급 구조원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을 갖는 동안 200여명의 원주민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대피하고 있다. 시위자들은 이날 '원주민 천막대사관'(Aboriginal Tent Embassy)에서 천막대사관 설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사진=뉴시스
발단은 당시 호주 최대 야당 자유당의 토니 애버트 당수의 발언이었다. 토니 애버트는 이날 연설에서 캔버라 구 의사당 앞에 설치된 ‘애보리진 천막대사관’이 무의미하며 철거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흥분한 원주민과 지지자들이 호주 의회 근처 식당에서 열린 호주의 날 기념메달 수여식장을 습격한 것이다.

천막대사관은 40년 전인 1972년 1월26일 호주 원주민 작가이자 예술가인 케빈 길버트가 캔버라의 구 의사당 앞에 세웠다. 호주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취지에서다. 그는 캔버라에서 원주민에 의한 항의 시위를 이끌기도 했던 인권운동가였다. 원주민 천막 대사관은 이후 부숴지고 다시 세워지고를 반복했지만 이후 전국적 원주민 운동을 촉발하면서 하나의 상징이 됐다.



대체 어떤 인종 차별 정책들이 원주민들을 이토록 분개하게 한걸까. (☞"굴러 온 돌, 박힌 돌 뺐다"… '호주의 날' 맞은 원주민 [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 ①] 참고) 원주민 사회는 호주 백인이 호주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서서히 무너졌다. 백인들과의 무력 충돌, 유럽 사회에서 온 질병들, 백인들로부터 뺏긴 사냥터, 백인들로부터 유입된 독한 럼주를 마시는 문화, 백인 남성에게 옮겨온 성병 등으로 인해서 말이다.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원주민은 이들을 '말살'시키려던 백인 정부에 의해 한 없이 무너졌다. 특히 호주 정부가 1915년부터 1969년까지 실시한 '원주민 동화정책'과 '문명화 정책'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정부는 10만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강제로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백인 가정 및 선교 기관 등에 위탁했다. 주로 피부색이 비교적 하얀 아이들은 '백인 사회에 섞이기 위해' 강제 입양됐다. 원주민 가정에선 피부색이 흰 아이들을 숨기거나 일부러 어둡게 만드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입양된 어린이들 다수가 농장 일꾼으로 전락했고, 또 상당수 어린이들은 신체적, 성적 학대로 고통 받았다. 결국 대부분은 적응하지 못해 마약과 알코올에 의존하게 됐다.

뿐만 아니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백인의 호주를 만들자는 주의)의 오랜 유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주는 호주 연방 형성 당시부터 몇십년에 걸쳐, 백인 이외의 인종을 차별하고 배제했다. 호주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 유입되는 인종은 대다수 아시아인들이었다. 자연히 백호주의의 피해자는 주로 원주민과 아시안들이 됐다.
1910년 '호주 원주민 협회' (Australian Natives' Association) 회원 배지./사진=위키커먼스1910년 '호주 원주민 협회' (Australian Natives' Association) 회원 배지./사진=위키커먼스
백호주의의 근원은 1851년 호주 골드러시 때다. 당시 호주에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 과정 낮은 임금의 중국인 노무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호주 백인들은 1910년대 '호주 원주민 협회'(Australian Natives' Association·보통 일컫는 호주 원주민, 즉 에버리진들이 아니다. 당시 호주 백인들은 자신들을 호주 원주민이라 일컬었다.)를 만들고 아시안계 이민을 제한했다.


백호주의의 맥락에서 원주민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백인들은 원주민을 자연유산으로 간주해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대신 수많은 규제만을 내렸다. 예컨대 백인이 원주민을 고용하는 데 부과되는 허가세는 개를 소유하기 위해 내는 허가세보다도 낮았다. 원주민들은 연방 정부의 승인 없이는 백인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속 터지는 건 백인들이 마음대로 세운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 즉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 원칙이었다. 원주민 입장에선 조상 대대로 물려내려오며 살던 땅인데, 어느 날 등장한 백인들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땅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이다. 부족의 땅은 오랜 세대를 거쳐 전해져 온 것이었다. 땅의 경계는 나무, 돌, 바위 등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주 백인들은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따라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라고 봤다. 원주민은 이들에게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호주 원주민의 토지소유권 소송을 제기해 11년 만에 승리한 에디 코이키 마보. www.youngworkers.org.au호주 원주민의 토지소유권 소송을 제기해 11년 만에 승리한 에디 코이키 마보. www.youngworkers.org.au
그렇게 땅을 빼앗긴 뒤 원주민들은 그 어느 곳에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었다. 억울함이 커지던 중 토레스 해협 원주민 에디 코이키 마보가 등장했다. 1939년 토레스 해협 머리 섬에서 태어난 그 역시 어렸을 때부터 부족 어른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부족의 땅을 인식해왔었다. 퀸즈랜드 제임스쿡 대학의 조경사로 일하며 독학한 마보는 1974년 대학의 역사학자들에게 부족의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자문을 청했다. 결국 마보는 1981년 여러 법률가들의 도움으로 1981년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도전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마보의 소송은 10년간 수차례 기각됐다. 하지만 마보는 연방 고등법원에 재차 소송을 제기했다. 그 사이 마보는 점차 피폐해져 1992년 1월 암으로 결국 사망했다. 마보의 사망 5개월 후 1992년 6월, 연방 고등법원은 마보 케이스(Mabo case)에 대해 "원주민의 주권이 엄연히 존재하며 원주민 혹은 도서 지역 사람이 토지의 소유권을 결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렇게 원주민의 주권과 토지소유권이 인정되며 지난했던 싸움이 끝나나 싶었다. 하지만 1996년 12월 윅 케이스(Wik case)에선 다른 판결이 나왔다. 연방 고등법원은 윅 케이스에 대해 동일 토지에 대해 원주민과 백인 모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되,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원주민에 비해 백인의 소유권이 우선해야한다고 판결했다. 즉, 호주 원주민의 '테라 눌리우스'에 대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1970년대 호주 백호주의도 공식 폐지됐고, 호주에선 이제 '다르다'는 의미가 강한 foreign(외국의) 대신 보다 세계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international(국제적인) 단어를 쓸 정도로 인권감수성이 향상됐다.

또 원주민들이 수십년간 요구해왔던 '에어즈락 명칭 변경'과 '등반 금지'도 드디어 시행됐다. 에어즈락(Ayers Rock)은 백인들이 부르던 명칭이고, 울룰루(Uluru)는 원주민들이 부르던 용어다. 울룰루는 백인을 비롯 외부인들에겐 단순한 기암괴석의 관광지에 그쳤지만 지역 원주민인 아난구족들에겐 신성한 성지였다. 여기엔 바위 동굴과 원주민이 그린 고대 벽화들이 많다.
2008년 관광객들이 울룰루를 등반하고 있다. /사진=위키커먼스2008년 관광객들이 울룰루를 등반하고 있다. /사진=위키커먼스
유네스코 선정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한 울룰루는 5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매년 25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호주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으로 꼽히면서 관광객들은 꼭 등반을 해왔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관광객의 74%가 등반에 나섰다. 그동안은 원주민들의 성지여도 그리 신경써주지 않았지만, 최근 원주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울룰루'로 불리게 됐고, 또 '등반'도 금지됐다. 울룰루-카타주타 국립공원 관리이사회는 오는 10월26일부터 울룰루 등반을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원주민 인권이 인정되고, 인종차별을 주의하자는 호주의 변화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호주가 변화한 이유가 '아시아 태평양 일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찝찝하다. 즉 베트남전이 끝나고 호주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가장 근접한 이웃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서 백호주의를 철폐해야한다고 생각했다는 분석이다.

호주는 1975년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면서, 호주와의 무역 거래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호주 사람들이 영국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권리도 잃었다. 반면 점차 아시아태평양 시장은 잠재력이 컸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커졌다. 호주인들은 이제 과거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잊고 아시아태평양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예상컨대 앞으로 호주 원주민은 매일 조금씩 더 나은 권리를 갖고, 보다 나은 대우를 받게될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호주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당위적 측면에서 그렇게 변화해야만 하기도 하고 말이다. 앞으로는 북부준주(NT)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원주민을 자주 볼 수 있게 될까. 구걸하거나 술에 취한 원주민이 아니라, 호주 사회 속에 섞여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을 말이다.

참고문헌
호주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신봉섭
세계를 읽다 호주, 가지, 일사 샤프
호주의 정체성에 나타난 원주민의 역사 문화유산의 가치와 확장성에 대한 문제점, 역사문화연구 제47집, 강재원
호주 원주민 문학에 있어서의 역사의 문제, 외국문학연구 제 16호, 윤혜준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힙스터 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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