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울룰루 /사진=위키커먼스
이 신발은 길라드 전 총리가 수도 캔버라에서 열린 '자랑스런 호주인' 행사에 참가했다가 자신들을 차별한다며 항의하는 원주민 시위대들에게 쫓겨 황급히 달아나면서 벗겨진 하이힐 한 짝이었다. 물론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이 신발은 25분만에 경매 목록에서 내려갔다. 경매 원칙상 소유자가 직접 매물 목록에 올리거나, 아니면 경매를 허락한 경우에 한해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베이 대변인은 "우리는 그 신발의 주인이 총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당사자가 판매를 허락한다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록에서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가 2012년 1월26일 '호주의 날'을 맞아 캔버라 한 레스토랑에서 열린 긴급 구조원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을 갖는 동안 200여명의 원주민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대피하고 있다. 시위자들은 이날 '원주민 천막대사관'(Aboriginal Tent Embassy)에서 천막대사관 설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사진=뉴시스
천막대사관은 40년 전인 1972년 1월26일 호주 원주민 작가이자 예술가인 케빈 길버트가 캔버라의 구 의사당 앞에 세웠다. 호주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취지에서다. 그는 캔버라에서 원주민에 의한 항의 시위를 이끌기도 했던 인권운동가였다. 원주민 천막 대사관은 이후 부숴지고 다시 세워지고를 반복했지만 이후 전국적 원주민 운동을 촉발하면서 하나의 상징이 됐다.
정부는 10만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강제로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백인 가정 및 선교 기관 등에 위탁했다. 주로 피부색이 비교적 하얀 아이들은 '백인 사회에 섞이기 위해' 강제 입양됐다. 원주민 가정에선 피부색이 흰 아이들을 숨기거나 일부러 어둡게 만드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입양된 어린이들 다수가 농장 일꾼으로 전락했고, 또 상당수 어린이들은 신체적, 성적 학대로 고통 받았다. 결국 대부분은 적응하지 못해 마약과 알코올에 의존하게 됐다.
뿐만 아니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백인의 호주를 만들자는 주의)의 오랜 유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주는 호주 연방 형성 당시부터 몇십년에 걸쳐, 백인 이외의 인종을 차별하고 배제했다. 호주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 유입되는 인종은 대다수 아시아인들이었다. 자연히 백호주의의 피해자는 주로 원주민과 아시안들이 됐다.
1910년 '호주 원주민 협회' (Australian Natives' Association) 회원 배지./사진=위키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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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주의의 맥락에서 원주민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백인들은 원주민을 자연유산으로 간주해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대신 수많은 규제만을 내렸다. 예컨대 백인이 원주민을 고용하는 데 부과되는 허가세는 개를 소유하기 위해 내는 허가세보다도 낮았다. 원주민들은 연방 정부의 승인 없이는 백인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속 터지는 건 백인들이 마음대로 세운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 즉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 원칙이었다. 원주민 입장에선 조상 대대로 물려내려오며 살던 땅인데, 어느 날 등장한 백인들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땅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이다. 부족의 땅은 오랜 세대를 거쳐 전해져 온 것이었다. 땅의 경계는 나무, 돌, 바위 등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주 백인들은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따라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라고 봤다. 원주민은 이들에게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호주 원주민의 토지소유권 소송을 제기해 11년 만에 승리한 에디 코이키 마보. www.youngworkers.org.au
마보의 소송은 10년간 수차례 기각됐다. 하지만 마보는 연방 고등법원에 재차 소송을 제기했다. 그 사이 마보는 점차 피폐해져 1992년 1월 암으로 결국 사망했다. 마보의 사망 5개월 후 1992년 6월, 연방 고등법원은 마보 케이스(Mabo case)에 대해 "원주민의 주권이 엄연히 존재하며 원주민 혹은 도서 지역 사람이 토지의 소유권을 결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렇게 원주민의 주권과 토지소유권이 인정되며 지난했던 싸움이 끝나나 싶었다. 하지만 1996년 12월 윅 케이스(Wik case)에선 다른 판결이 나왔다. 연방 고등법원은 윅 케이스에 대해 동일 토지에 대해 원주민과 백인 모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되,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원주민에 비해 백인의 소유권이 우선해야한다고 판결했다. 즉, 호주 원주민의 '테라 눌리우스'에 대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1970년대 호주 백호주의도 공식 폐지됐고, 호주에선 이제 '다르다'는 의미가 강한 foreign(외국의) 대신 보다 세계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international(국제적인) 단어를 쓸 정도로 인권감수성이 향상됐다.
또 원주민들이 수십년간 요구해왔던 '에어즈락 명칭 변경'과 '등반 금지'도 드디어 시행됐다. 에어즈락(Ayers Rock)은 백인들이 부르던 명칭이고, 울룰루(Uluru)는 원주민들이 부르던 용어다. 울룰루는 백인을 비롯 외부인들에겐 단순한 기암괴석의 관광지에 그쳤지만 지역 원주민인 아난구족들에겐 신성한 성지였다. 여기엔 바위 동굴과 원주민이 그린 고대 벽화들이 많다.
2008년 관광객들이 울룰루를 등반하고 있다. /사진=위키커먼스
원주민 인권이 인정되고, 인종차별을 주의하자는 호주의 변화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호주가 변화한 이유가 '아시아 태평양 일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찝찝하다. 즉 베트남전이 끝나고 호주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가장 근접한 이웃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서 백호주의를 철폐해야한다고 생각했다는 분석이다.
호주는 1975년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면서, 호주와의 무역 거래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호주 사람들이 영국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권리도 잃었다. 반면 점차 아시아태평양 시장은 잠재력이 컸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커졌다. 호주인들은 이제 과거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잊고 아시아태평양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예상컨대 앞으로 호주 원주민은 매일 조금씩 더 나은 권리를 갖고, 보다 나은 대우를 받게될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호주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당위적 측면에서 그렇게 변화해야만 하기도 하고 말이다. 앞으로는 북부준주(NT)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원주민을 자주 볼 수 있게 될까. 구걸하거나 술에 취한 원주민이 아니라, 호주 사회 속에 섞여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을 말이다.
참고문헌
호주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신봉섭
세계를 읽다 호주, 가지, 일사 샤프
호주의 정체성에 나타난 원주민의 역사 문화유산의 가치와 확장성에 대한 문제점, 역사문화연구 제47집, 강재원
호주 원주민 문학에 있어서의 역사의 문제, 외국문학연구 제 16호, 윤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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