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나쁜 기억 지우개가 '나쁜' 이유

머니투데이 김주현 기자 2019.01.1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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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양은 서울 종로구 00고등학교 화장실에 앉아 남자친구 고민을 털어놨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한테도 꺼내지 못할 개인적인 고민이었기에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익명 앱에 자세한 고민 글을 적었다. 위로의 댓글이 달렸다. 상대방은 내가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몇 살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적은 이 글은 다음날 자동으로 지워진다.

이 앱은 친구에게 소개받았다. 주변 친구들도 많이 쓴다고 했다. 내려받기를 하려 보니 다운로드 수가 이미 50만건을 넘어있었다. 10대 이용자가 많아 댓글도 잘 달린다고 했다. 하루가 지나면 글이 자동 삭제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서비스 약관에 동의하고 시작하기를 눌렀다. 약관을 클릭해 살펴보려 했지만 전부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듯 해 일단 동의했다.



A양은 다음날 뉴스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나쁜 기억 지우개’ 앱이 이용자들의 고민 내용과 출생연도, 성별, 작성 위치 등이 담긴 '지역별 청소년 고민 데이터'를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에 판매하려 했다는 기사였다. 그것도 월 500만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A양이 전날 고민글을 올렸던 바로 그 앱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회사 측에선 유튜브에 사과글을 올렸다. 24시간 후 글을 삭제되지만 이후 백업 데이터로 데이터를 보관해오고 있었다고 했다. 서비스 이용 약관에 성별·나이·위치 등 백업 데이터에 쌓인 콘텐츠를 제휴 관계사나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고 동의한 이용자의 데이터만 연구나 통계 목적으로 판매를 시도했다고 변명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나쁜기억지우개 주식회사의 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나섰다.

나쁜 기억 지우개는 ‘사용자들의 진실된 고민을 돈 받고 팔아치웠다’는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색창 앞에서, 익명의 SNS 앞에서 현실보다 더 진실해진다. 서비스 약관에 개인정보 이용 관련 내용이 담겨있다는 주장은 궁색하다. ‘24시간 후 글이 삭제된다’는 마케팅을 전면에 내세운 상황에서 데이터 저장을 의심해 볼 이용자는 없다. 이용자들은 개인정보 취급 약관을 상세히 읽진 않는다. 서비스 초기부터 사용자들의 정보가 백업 데이터로 쌓이고, 제휴 관계사에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명확히 알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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