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콰피나, 원 앤 온리

황효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18.10.3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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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ight Live©Saturday Night Live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래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배드 랩’에서 남성 래퍼들은 “동양인 남성보다는 동양인 여성을 마케팅하기가 훨씬 쉽다”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포르노만 봐도 동양인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지 않냐는 그들의 엉뚱한 논리에, 아콰피나는 주로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성 상품화를 지적하며 이렇게 되묻는다. “이상한 여자라면 마케팅하기 쉬울까요? 키는 완전 작고 전혀 섹시하지도 않은 여자요.” 본명은 노라 럼.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키 160cm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자, 스스로 “이혼 전문 변호사 같다”, “일곱 살 때부터 ‘일곱 살이냐 일흔다섯 살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설명할 정도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래퍼 겸 코미디언 겸 배우. 인터뷰나 토크쇼에서는 물론, 랩으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버리는 아콰피나는 백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아시안 여성의 이미지에서 한참 떨어져 있지만, 흥미롭게도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열다섯 살에 이미 아콰피나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던 그는 2012년, ‘My Vag’이라는 제목의 랩을 유튜브에 공개하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주구장창 자신의 성기를 자랑하는 남성 래퍼 미키 아발론의 ‘My Dick’에 대한 답가로 만들어진 이 랩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성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Vag’라는 단어가 53번이나 등장하는 이 랩 때문에 아콰피나는 당시 일하고 있던 회사에서 잘려야 했지만, 뮤직비디오는 3백 만번 이상 재생되며 인터넷상에 급속도로 퍼졌다. 자그마한 체구의 아시안 여성이 뮤직비디오에서 무표정으로 랩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성기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My Vag’는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은 곡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후로도 아콰피나는 한국계 미국인 배우 마거릿 조와 함께 아시안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비웃고(‘GREEN TEA’), 여성의 성기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스웨그 담긴 랩으로 옮겨오는 등(‘Queef’) 자신의 정체성에 바탕을 두면서도 유머만큼은 놓치지 않는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주요 캐릭터가 모두 여성인 ‘오션스 8’, 그리고 오로지 아시안 배우들로만 구성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 그가 웃음을 담당하는 역할로 캐스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얼마 전 아콰피나는 ‘Saturday Night Live’(이하 ‘SNL’)의 호스트가 되었다. 아시안 여성이 호스트로 출연한 것은 루시 리우 이후 약 18년 만의 일이었다. 아콰피나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같은 동양인 여성인 루시 리우를 ‘SNL’에서 보며 새로운 꿈을 품을 수 있었다고, 그것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고 벅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아콰피나 역시 그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있을 것이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그 달라지는 풍경 속에 아콰피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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