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날]연인 간 영상이 'XX녀'로…SNS서 순식간에 쫙

머니투데이 유승목 기자 2018.10.14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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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폭력-②]피해자 인생 송두리째 흔드는 불법 촬영물 유포·소비…"보는 것도 범죄"

편집자주 월 화 수 목 금…. 바쁜 일상이 지나고 한가로운 오늘, 쉬는 날입니다. 편안하면서 유쾌하고, 여유롭지만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은 쉬는 날, 쉬는 날엔 '빨간날'

/삽화= 머니투데이DB/삽화= 머니투데이DB


[빨간날]연인 간 영상이 'XX녀'로…SNS서 순식간에 쫙
헤어진 남
친구와 다투던 가수 구하라씨(27)가 무릎을 꿇었다. 전 남자친구 최모씨(27)로부터 전송된 성관계 촬영 동영상을 보고 나서다. 연인 간에 지켜져야 할 사생활이 생면부지 대중들에게 공개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구씨는 영상을 지워 달라며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연인 간 촬영 영상을 유포하는 '디지털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상·사진들이 온라인에서 다양하게 유통·소비되고 있다. 특히 음란 웹사이트나 SNS가 문제시 된다. 익명성을 전제로 빠르게 퍼지는 탓에 손 쓸 도리가 마땅찮다. 하지만 유포자들은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어 피해자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애인 '배신'보다 무서운 '유포'
불법 촬영물 유포 피해는 연예인 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8월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정부가 불법촬영물 삭제를 돕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를 설치한 지 100일 만에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신고가 2358건에 달했다. 이 중 상당수는 유포피해(42.3%)까지 당했다. 하지만 수치심과 사회적 통념에 눌려 피해 사실을 밝히기 꺼리는 이들이 더 많다. 드러난 피해는 겨우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시각이다.

이처럼 동의나 허락 없이 찍힌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담은 사진·영상이 버젓이 인터넷에 떠돌게 되면 피해자는 공포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온라인 공간 특성 상 한 번 유출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기 때문. 여가부가 밝힌 디지털 성폭력 피해 신고자 중 한 명은 유포된 영상의 수가 무려 1천 건에 달했다. 피해자들은 유출 영상이 가족 등 가까운 지인이나 직장, 학교 동료에게까지 노출될까봐 노심초사 할 수 밖에 없다.
유출된 불법 음란물을 거리낌 없이 찾고 소비하는 모습. /사진= 인터넷 커뮤니티유출된 불법 음란물을 거리낌 없이 찾고 소비하는 모습. /사진= 인터넷 커뮤니티
유포된 영상물은 금새 'XX녀', 'OO녀'라는 꼬리표가 붙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유희거리로 전락한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 대표는 "자신의 모습이 유포되는 순간 이를 거리낌 유포하고 죄책감 없이 소비하는 대중이 있어 피해자는 2차 피해를 당한다"고 말했다. 서 대표 말처럼 피해자들은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 심할 경우 극단적 선택까지 한다.

◇소라넷 빈 자리 SNS가 메워
유출 영상이 주로 유통되는 곳은 음란 웹사이트나 웹하드다. 이용자가 100만명에 달했던 국내 최대 음란물 사이트 '소라넷'이 2016년 폐지됐지만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여전히 '유사 소라넷'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웹하드에서는 유출된 영상이 얼굴이나 중요 부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국산 노모'나 'XX녀 유출' 등으로 교묘하게 이름이 바뀌어 돈을 받고 팔리는 판매 상품이 된다.

최근에는 해외에 서버를 둔 SNS를 통해 영상을 유통·소비하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확산 속도가 더 빠르다. 지난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사이버 성폭력 피해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전체 피해 중 40.9%가 SNS에서 발생했다. 불법 포르노사이트(39.4%)와 국내 웹하드(15.1%)보다 높았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전 세계 1억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텀블러'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미 불법촬영 음란물의 온상이 된 텀블러에서는 '여친', '몰카', '제보'라는 단어만 검색해도 수 많은 유출 영상·사진이 펼쳐진다.
/사진= 텀블러 메인화면 캡처/사진= 텀블러 메인화면 캡처
SNS가 새로운 유출 동영상의 온상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접근성·보안성이 높기 때문이다. 텀블러는 별도 인증 절차 없이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면 쉽게 익명 가입할 수 있다. 본사와 서버 등이 미국에 있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불법유해정보사이트' 제재 대상에서도 빠진다. 지난해 방통위가 음란물 2만2000여건의 시정을 요구했지만 텀블러 측은 "미국회사기 때문에 한국 법률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답하며 거절하기도 했다.


반대로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린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입을 경우 피해자들은 유출 영상 등을 삭제하기 위해 '디지털 장의사' 업체에 비용을 들여 의뢰한다. 대체로 효과가 있긴 하지만 절차가 까다로워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김현걸 사이버보안협회 이사장(디포렌식코리아 대표)은 "불법유출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삭제 골든타임'을 지키는 것인데 해외 서버를 둔 SNS나 웹사이트는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소요돼 피해가 가중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산업이 된 디지털 성폭력, '보는 것도 범죄'
촬영물 유출 등 피해가 발생했을 때 디지털 장의사 업체를 비롯, 정부나 여성 단체 등이 삭제 지원 등 피해 구제에 힘쓰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단순히 영상을 찾아 지우는 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 유출물이 전부 지워진다는 보장도 없다. 심지어 불법 촬영 범죄가 산업으로 번지며 피해자를 속이는 디지털 장의 업체 폐해까지 생기는 상황이다.
불법촬영·유포 등 디지털 성범죄 처벌 현황/그래픽= 이승현 디자인기자불법촬영·유포 등 디지털 성범죄 처벌 현황/그래픽= 이승현 디자인기자
지난해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은 "디지털장의사에게 영상 삭제를 요청했다가 오히려 영상이 늘어났다는 피해 제보가 접수됐다"며 웹하드사와 필터링 업체, 디지털장의 업체의 유착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의뢰비를 받고 사라지거나 음란물 플랫폼과 결탁해 3차 피해를 입히는 식이다. 김현걸 사이버보안협회 이사장은 "해당 직업을 국가 자격으로 관리하고 당국이 업체 검열 강도를 높여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디지털 성폭력 촬영물 유포·소비에 거리낌 없는 사회 인식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승희 한사성 대표는 "법적 처벌이 약하다보니 연인 간 촬영물을 유포하고 소비하는 것을 '성적인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며 "보는 것 마저 범죄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법적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음란물 유포로 재판 받은 1680명 중 징역·금고형을 받은 인원은 30명(1.8%)에 불과했다.

서 대표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처벌이 강화된 이후 음란물 플랫폼에서도 관련 음란물을 쉽게 찾기 어렵게 됐고 이를 소지·소비하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다"며 "연인 간 촬영물 유포나 몰래카메라 등 불법촬영물도 이같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보다 명확한 규제와 실질적인 처벌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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