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걸음이 쫓아온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8.10.06 08:00
글자크기

<157> 차성환 시인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시인의 집]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걸음이 쫓아온다


2015년 계간 '시작'으로 등단한 차성환(1978~ )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는 가족의 해체 혹은 부재로 인해 겪어야 했던 아픈 성장사를 다루고 있다. 나를, 나의 상처를 드러내는 행위가 쉽지는 않으므로 시인은 동화나 꿈, 언어유희를 통해 현재진행형인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현실세계를 시로 전환시키고 있다. 안락이나 행복의 자리에 불행이나 죽음, "손목을 잡아다 식칼을 꽂는"('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것과 같은 그로테스크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한곳에 오래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무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새를 길러낸다면 독한 나무임에 틀림없는 그 고독한 나무는 떠날 수 없어서 새들을 항상 떠나보내고 다시 찾아오는 새들을 열렬히 환송하기 위해 매번 자리를 내어주고 벌레들이 나무의 길을 내면서 열심히 떠나는 중일 때 나무는 더 큰 움직씨를 품어 풍성하게 열린 울다 때리다 빌다 찌르다 흐느끼다 펄럭이다 소리치다를 모두 떨어뜨리고 압도적으로 앙상한 나무만 남아 더 큰 바람을 상영하는 무대를 펼쳐 보이고 나무는 걸어갈 수 없고 사라질 수 없고 수직으로 누워 자기 그림자를 끌어당긴다
- '겨울' 전문




이번 시집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걷다'와 '앉아있다'는 누군가를 잊거나 그리워하는 행위이면서 아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다. '걷다', 특히 "강물을 따라 걷"('담장길강물길담장')는 행동에는 강을 건너 떠난 사람(엄마)에 대한 애증이 걸음마다 스며있다. 강(물)의 이미지 또한 떠난 엄마와 관련이 있다. 자꾸만 걷는 시인은 앞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 뒤로 걸으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현실에 시인은 스스로 구렁을 파고 들어가 눕거나('흙무더기와 구렁') "의자에 앉아 먹고 마시고 쓴다"('의자 4'). 시인에게 시는 '나'를 위로해주는, 악몽 같은 현실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므로, "다시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앉아"('의자 1') 쓴다.

시인은 끊임없이 '자리'를 돌아본다. 그 자리는 "신나고 즐겁고 지루하고 끔찍하고 슬프"('의자 1')지만 대체로 불안하고 불편하다. 고독한 나목(裸木)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 '겨울'에서도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두렵고 황망하다. 한곳에 정착한 나무(엄마)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새", 즉 자식들을 길러내고 떠나보낸다. 나무와 함께 살고 있는 "벌레들이 나무의 길을 내면서 열심히 떠나는 중일 때" 폭력은 시작된다. 피해자는 울고, 빌고, 흐느끼지만 가해자는 때리고, 찌르고, 펄럭이고, 소리친다. 새들이 나무의 품을 떠날 때까지는 "걸어갈 수 없고 사라질 수 없고 수직으로 누워 자기 그림자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 시인은 "마시고 먹고 채우고 흐르고 떠나고"('고야')나 "구른다 긴다 일어선다 넘어진다 끓는다"('무릎')와 같은 움직씨(동사)를 통해 심경을 드러낸다.



오지 않는다 모레 온다고 했던 모래 여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건만 떠나자마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잘라버렸다 모래 밥을 안쳐놓고 오지에 가서 오지 않는 여자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아닌 모레 온다고 한 여자 잘린 손가락에 대마초가 피고 냄새를 맡은 경찰이 철문을 두들긴다 방구석에 놓인 관 뚜껑이 열리고 삼베옷을 입은 아버지가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대마잎을 염소처럼 뜯어 먹고 나는 염소젖을 쓰다듬으며 음마 음마 소리 내 운다 모레에 오지 않을 것 같고 와도 안 될 것 같은 여자 귓가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도시는 황사로 가득한데 치맛자락을 붙잡은 내게 모레에 올게 모래를 흩뿌리며 사라진 여자 뻑뻑한 눈알을 긁어대는 나를 두고 모레 온다며 떠난 여자 모래를 씹으며 모레를 세면 손가락들이 모래로 떨어지고 방 안에 나 대신 모래 한 부대 부려놓고 달아난 여자 대마꽃처럼 푸슬푸슬한 붉은 입술로 도망간 모래, 모레, 모래 여자
- '모래 여자' 전문


등단작 중 한 편인 '모래 여자'는 "모레 온다"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지만 끝내 오지 않는 모래 같은 여자(엄마)와 방구석에서 "잘린 손가락에 대마초"를 피우는 아버지, "염소젖을 쓰다듬으며 음마 음마 소리 내" 우는 '어린 나'라는 가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붉은 눈에 칼을 들고"(이하 '칼로 1') "다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 지르는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어린 나'를 두고 도망간다. 엄마가 "떠나자마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치고, "경찰이 철문을 두들"기는 최악의 상황에서 '어린 나'는 울면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황사로 가득한" 도시는 주변 환경마저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고 "모래로 떨어지"는 손가락은 "모레 온다"는 엄마의 약속이 지켜질 수 없음을 암시한다. 시 '겨울'에서 엄마라는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했지만 결국 엄마가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불타는 숲의 이야기를 해주마 영원히 불타는 숲의 오두막에 나무꾼이 살았고 나무꾼은 춤추는 빨간 구두 소녀를 붙잡아 발목을 자르고 강간을 하고 사지를 찢어발겨 깊은 숲 속에 버렸단다 비가 내리자 핏물이 숲을 적시고 도끼 같은 벼락이 숲의 한가운데 떨어져 불꽃이 피고 불꽃이 나무와 나무꾼과 나뭇잎과 산짐승과 벌레들과 물고기를 불태우고 시냇물은 끓어올라 바위를 삶고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불꽃의 열기에 새들이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밤낮없이 숲을 짓밟는 불꽃 속에 시뻘건 구두가 탭댄스를 추며 격렬하게 타오르고 천 년이 가도 타오르는 숲의 잿더미 위에 불타는 구두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 '숲' 전문



시 '숲'의 "불타는 숲의 이야기" 또한 잔혹하다. 오두막에 사는 나무꾼은 "춤추는 빨간 구두 소녀를 붙잡아 발목을 자르고 강간을 하고 사지를 찢어발겨 깊은 숲 속에 버"린다. 비가 내려 "핏물이 숲을 적시고", 벼락이 "숲의 한가운데" 떨어지고, 불은 "나무와 나무꾼"을 비롯해 숲 전체를 태운다. "탭댄스를 추"던 "불타는 구두"가 "천 년이 가도 타오르는 숲의 잿더미 위"에서 타오른다.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천 년 동안 잠들지 않는 화산과 시 쓰기가 불타는 숲의 이미지를 통해 동일시되는 것. 그 지점에 "손끝을 떠나 끝이 없는 첫"('첫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이 있고, "시 쓰기 좋아하는 양치기 소년"('낭독회')가 있다.

차성환의 시는 꿈과 현실을 수시로 넘나든다. 우물은 "우울을 거꾸로 쏟아붓"('우울')고, "무덤 속의 나는 무덤을 등에 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무덤')가고, "사다리는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 또 다른 게임을 생각"('사다리')하고, "꽃잎을 뜯으면서 나는 비늘이 돋고"('꽃잎'),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걸음이 쫓아"('걸음 2')오고, "아내는 행복하게 침대에 누워 그물에 걸린 남편을 기다리고"('뚱뚱이 나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피"('꽃')고, "나는 붉은 벽돌 공장"('붉은 벽돌')이 되기도 하는 등 악몽 같은 생(生)의 "한 페이지를 찢어"('시인의 말')버리고 싶을 만큼 그의 현실은 고통스럽다. 시인은 아직도 "무덤 같기도 하고 잠깐 통로 같기도"(이하 '구렁') 한 구렁 속에서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차성환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88쪽/9000원.

[시인의 집]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걸음이 쫓아온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