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죄 관련 청원 동의 45만… "韓, 무고 가해자의 천국?"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2018.07.09 05:00
글자크기

[무고죄의 진실-①] 대검찰청 성폭력 수사 매뉴얼, 국제 가이드라인 따르는 사례

임종철 디자인기자임종철 디자인기자


#지난해 7월 학생 성추행 의혹으로 전북 학생인권센터에서 조사를 받던 고(故) 송경진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4월 그의 동료 체육교사는 여학생 7명을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그를 전북 부안교육지원청과 부안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 측은 사건을 무혐의로 즉시종결했으나, 학교 측은 징계벌과 형사벌은 다르다며 그를 직위해제시켰다.

부안교육지원청은 송 교사를 출근 정지시켰고, 그는 전북교원연수원에서 3개월여간 대기발령근무를 명받았다. 직위해제 기간이 끝나자 부안교육지원청은 그를 타학교로 전보조치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신고한 학생들이 '송교사가 사실은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는 탄원서를 교육감에게 보내며 상황이 반전됐다. 학생들은 '야자 시간에 서운했던 일이 빨리 해결될 줄 알았다' 등의 이유로 그를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성추행 무고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였던 것이다.



#명문대 졸업 후 국립대학교 교직원 채용에 합격해 한달 뒤 새 직장에 출근할 예정이었던 A씨. 그의 인생은 2010년 5월 경찰에 체포되며 꼬이기 시작했다. 일면식 없는 가출소녀 B양(16)이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지목하면서다. B양은 우연히 주운 휴대전화에 저장된 A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이후 그를 성폭행범으로 신고했다. A씨는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지만, 새 직장에 출근하지 못해 합격이 취소됐다. 가출 중 임신을 한 B양은 어머니의 추궁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폭행 무고 피해자들의 대표적 사례다. 이들의 사례를 공유하며 성범죄 무고 피해자가 될까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적잖다.



앞서 미투(Me Too) 운동이 이어지면서 굵직한 정치인, 연예인, 예술가 등이 성폭행 가해자로 밝혀지는 분위기에 부담감을 느끼던 와중 대검찰청이 지난 5월11일 성폭력 사건 수사가 종료되기 전까지 무고 수사를 진행하지 않도록 하는 '대검찰청 성폭력 수사매뉴얼'을 배포하며 이런 경향이 거세졌다. 여기에 얼마 전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던 인기 유튜버 양예원씨가 스튜디오 실장과 나눈 카톡 대화내용이 공개된 사건도 무고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금 강화했다.

청와대 국민청원방에 무고죄 관련 청원이 올라와 연달아 20만명의 청원인을 넘긴 때도 이때쯤이었다. 지난 5월25일 올라온 '무고죄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합니다'라는 청원과 지난 5월28일 올라온 '대검찰청의 무고죄 관련 성폭력 수사 매뉴얼 중단을 요청합니다' 청원은 각각 24만, 21만명의 동의를 받으며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주로 "대검찰청의 '무고죄 관련 성폭력 수사 매뉴얼'은 한국만의 불합리·불평등한 매뉴얼이며" "한국에서 유독 성범죄 무고를 저지르는 이들이 많아 억울하게 성폭력 가해자로 몰리는 사례가 많다" 등의 내용에 공감한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인지에 초점을 두고 이를 두 편에 걸쳐 파헤쳐본다.
청와대 국민청원방에 올라온 국민청원. '무고죄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합니다'(위) '대검찰청의 불법적인 성폭력 수사 매뉴얼 중단을 요청합니다' 각각 24만, 21만 청원을 받았다.청와대 국민청원방에 올라온 국민청원. '무고죄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합니다'(위) '대검찰청의 불법적인 성폭력 수사 매뉴얼 중단을 요청합니다' 각각 24만, 21만 청원을 받았다.
◇"대검의 무고죄 성폭력 수사 매뉴얼, 한국만의 불합리한 제도?"
지난 5월28일 법무부와 대검찰청은 '성폭력 수사 매뉴얼'을 새롭게 개정했다고 밝혔다. 개정된 매뉴얼은 전국 59개 검찰청 여성아동범죄 조사부 등에 배포했다. 성폭력 범죄 피해자들이 보다 안전하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대검은 또, 성폭력 피해사실 공개로 인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사건에 대해 '위법성 조각사유'(형법 310조·제307조 1항(명예훼손)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 적용을 검토하기로 했다. 법을 위반했더라도 공익적 목적이 커 처벌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검 형사부는 피해자들의 역고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앞으로 성폭력 고소사건과 관련한 무고혐의 수사 때 성폭력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수사를 중단하기로 했다. 이 같은 내용의 수사 매뉴얼이 배포됐다고 알려지자마자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 '대검찰청의 무고죄 관련 성폭력 수사 매뉴얼 중단을 요청합니다' 청원이다.

이들은 "대검찰청이라고 헌법을 무시할 수는 없다.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을 너무 많이 위반하고 있다"며 해당 매뉴얼이 헌법을 위반한 불공정한 매뉴얼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상 내용 중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27조 3항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37조 1항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등이다. 일각에선 해당 수사 매뉴얼이 한국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생긴 한국만의 불공정, 부정의한 매뉴얼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대해 노영희 변호사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동시 수사를 한다 치더라도 당연히 먼저 성폭력 수사를 해야 그게 무고인지 아닌지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순서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그 동안에 그렇게 해왔는데. 이걸 명문화하다보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같다"며 법적으로 문제될 정도의 기본권 침해가 발생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취지로 말했다.

대검 수사 매뉴얼이 한국에만 있다는 주장도 틀리다. 오히려 이제야 국제적 기준에 발맞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앞서 지난 2월22일 UN 여성인권차별위원회(CEDAW) 제8차 국가보고서 심의 자리에서 루스 핼퍼린 카다리 CEDAW 부의장은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받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고소하거나 이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며 "성폭력 피해자가 이렇게 2차 피해를 받는 상황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3월12일 CEDAW는 한국 정부에 "성폭력 피해를 경찰에 신고하면 피해자가 명예훼손으로 기소되는 등의 현실은 2차 피해로 이어지고 피해자를 침묵하게 한다"며 대처 권고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내용은 경찰 대상 교육훈련 자료와 가이드라인 등을 개발하는 기관인 국제경찰장협회(IACP)가 제시하는 무고 기소 요건에도 나타나 있다. 협회는 △경찰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철저하고 완벽한 수사 완료 △피해자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행동, 반응에 의존하는 등 수사관 심증·불신·짐작에 따른 예단 지양 △수사 결과 성폭력이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았고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물리적 증거 제시 등을 무고 기소 요건으로 정했다. 이처럼 '수사 가이드라인'은 국제적 기준에 적합하다는 게 중론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