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치킨의 경우의 수

서지연 ize 기자 2018.06.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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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8일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첫 경기가 있던 날, 구글은 월드컵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두들을 걸었고 그들의 손에는 닭다리가 들려 있었다. 시합 내내 SNS에는 치킨에 대한 글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한국인들의 치킨에 대한 열망은 승리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뜨겁기에, 경기가 있는 날 치킨을 구매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눈치싸움을 동반한다. 월드컵 경기 날 치킨을 차지하기 위한 경우의 수를 모아보았다.
월드컵과 치킨의 경우의 수


하루 전에 경기 시간에 맞춰 배달을 예약한다

하루 전 예약을 시도했을 때 대부분의 치킨집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지난번 일부 손님들이 경기 시간에 맞춰 배달을 예약했지만, 주문이 몰리며 한 시간에서 두 시간가량 늦게 배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치킨집 사장님은 “거리가 가까우면 직접 가져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며 “만약 배달을 원한다면 최소 1시간 반 전에는 전화하시는 게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유일하게 배달 예약을 받아준 곳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A 치킨집이었다. 처음에는 포장 예약도 곤란하다며 난감해하던 사장님은 주소와 그동안의 주문 내역을 확인한 후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최대한 시간에 맞춰 치킨을 가져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일 경기가 시작되도록 치킨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해야 할까’ 망설이던 그때 치킨집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이라도 치킨을 가져다 드릴까요?”라는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치킨은 전반전이 끝날 무렵에야 도착했다. 평소보다 치킨의 양이 적은 듯했지만, 땀으로 흥건한 배달원의 얼굴을 떠올리니 불평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경기 2시간 전 배달앱으로 주문한다
경기 시작이 가까워질수록 전화와 배달앱은 먹통이 되기 마련이다. 경기 2시간 전 떨리는 마음으로 배달앱을 열었다. 남들보다 한발 빨랐던 덕분일까. ‘치켓팅’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월하게 원하던 B 치킨을 주문할 수 있었다. ‘적어도 1시간 반 전에 주문해달라’는 치킨집 사장님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치킨이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 역시 약 30분 정도로 양호한 수준이었다. 따끈따끈한 치킨을 두 손에 받아들자 일단 ‘됐다’라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났다. 문제는 경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튀긴 닭에서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참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결국 치킨 상자를 보이지 않는 방구석으로 치워놓았지만,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따뜻한 치킨을 뜯고 싶은 본능과, 그렇게 되면 경기 시작도 전에 치킨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성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기왕이면 경기 휘슬과 함께 인내의 결실을 맛보는 것을 권한다. 치킨은 식어도 맛있으니까. 온도는 포기할지언정 바삭함마저 포기할 수 없다면 받자마자 상자를 활짝 열어놓는 것이 좋다.



경기 1시간 30분 전 직접 찾으러 간다
‘직접 가져가는 게 제일 빠르다’는 치킨집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경기 1시간 30분 전 C 치킨집을 찾았다. 몇 번 배달을 시킨 적은 있었으나 직접 매장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으슥한 골목에 위치하고 있어 어렵게 찾아간 치킨집은 테이블 없이 배달에만 주력하는 곳으로, 작은 주방 안에는 젊은 남성 두 명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매장 안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어서인지, 뜻밖에도 “10분만 기다려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마침 사장님으로 보이는 남성이 막 배달을 마치고 들어왔다.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그의 말처럼 매장은 총성없는 전쟁터였다. 카운터의 전표는 길게 늘어지다 못해 또아리를 틀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사장님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주문을 거절하더니, 급기야 직원들을 향해 은밀하게 ‘홈서비스와 배달앱을 꺼놓으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치킨은 약속대로 10분 만에 완성됐다. 따끈한 치킨을 받아들며 배달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자 “지금 같으면 장담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님은 전표를 순서대로 붙여놓은 카운터를 가리키며 저번 경기 때는 ”여기 불일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며 웃었다.

경기 1시간 전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을 공략한다
만약 치킨집에서 치킨을 구입하지 못했다면, 패스트푸드점과 편의점을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의 패스트푸드점에는 치킨 메뉴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 더구나 소량으로도 치킨을 판매하고, 가격 역시 치킨 전문점보다는 저렴한 편이어서 1인 가구에게 좀 더 유리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단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라면, 경기 전에 문을 닫을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그럴 경우 마지막 방법은 편의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매장에서 직접 치킨을 튀기는 편의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기가 있던 날, 낮에 방문한 D 편의점에는 그야말로 전운이 감돌았다. 출입문에는 월드컵 경기 날짜와 중계 시간이 쓰여 있었으며, 치킨을 반값 세일한다는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평소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매대에 모든 종류의 치킨이 가득한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경기 1시간 전 다시 들른 편의점에는 치킨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밤이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알바생 뒤편에는 튀김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앞에는 해동하려고 내놓은 듯한 닭다리가 올라와 있었다. 도대체 치킨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한국인들은 치킨을 먹기 위해 월드컵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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