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앤장·삼일만 믿었다가"…기업 '소통 리스크' 부각

머니투데이 장시복 기자, 최석환 기자 2018.05.2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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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車 지배구조 개편안 제동, '소통리스크' 확인...대형 로펌·회계법인 의존 전략적 실패

현대차 서울 양재동 본사/사진=뉴스1현대차 서울 양재동 본사/사진=뉴스1


'법률·회계 만능주의'가 불러온 전략 실패.

현대자동차 (251,000원 ▼500 -0.20%)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 제동을 계기로 기업들이 법 조문과 숫자에 매몰돼 경영환경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대내·외 '소통 리스크'가 재조명되고 있다.

22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삼일PwC 회계법인, 골드만삭스, NH투자증권 등을 1년여 전부터 자문사로 선임, 그룹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마련해왔다.



정부와 시장의 지배구조 개선 압력이 높아짐에 따른 것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순환출자 해소 등 지배구조 개편안 '데드라인'으로 '3월말 주총 시즌'을 못박은 바 있다.

현대차는 철저한 보안 속에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마련해왔고 "준비 중"이라는 입장 외에 지배구조개편 방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시장에서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지만, 지배구조와 관련한 학계나 시장 전문가들과의 비공식적 소통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여론과 시장 목소리를 듣는 홍보(대외협력)와 IR(투자자설명활동) 등의 부서도 이번 지배구조 개편안 마련 작업에서는 배제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의 한 최고위급 관계자도 "1년 전부터 그룹 내 극소수만 개편안의 방향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결국 3월 28일 발표된 개편안은 시장의 예상을 깬 내용이었다. 시장은 물론 그룹 내부에서도 놀라움이 컸다. 계열사간 분할·합병을 통해 지배회사(존속 현대모비스 (228,500원 ▼1,000 -0.44%))를 두고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밑그림을 설계한 건 두 법률·회계 자문사였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안은 철저하게 지켜졌을지 모르지만 대내·외 평가를 두루 받을 수 없다는 한계도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한계가 지니는 위험성은 복병을 만나면서 현실화했다. 지난달 4일 이후 미국계 행동주의 벌처펀드 엘리엇이 등장해 공격을 펼친 것이다.


엘리엇의 여론전에 세계적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라스루이스와 국내 의결권 자문회사들도 반대의 뜻을 밝혔다.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사인 기업지배구조원도 반대의사를 밝히면서 개편안의 주총통과가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국민연금으로서는 현대차 지배구조 개선안에 대한 공감대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주총 직전인 지난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엘리엇에 흔들리지 않겠다"며 '글로벌 금융 허브' 미국 뉴욕으로 달려가 투자자 설득에 나섰지만 홀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엔 역부족이었고, 시기도 늦었다는 평가다.
정부회장은 결국 외국 기관투자가들의 현지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파악한 뒤 귀국해 전날 임시 이사회에서 전격 철회라는 결단을 내렸다. 주총에서 개편안이 부결돼 더 큰 타격을 입기보단 개선·보완해 재추진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

정 부회장은 이례적으로 본인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어떠한 방안도 주주들과 시장의 충분한 신뢰와 지지를 확보하지 않고선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주들과 시장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더욱 적극적으로 폭넓게 소통하겠다"고 약속했다.

재계에선 '이름 값'을 믿고 외부 대형 로펌이나 회계법인의 판단에 주요 전략적 결정을 의존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적지 않다. 모 대기업 총수가 율사 출신 참모와 로펌 등의 조언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가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일이 대표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법률 회계 관련 전문가 그룹의 자문도 필요하지만 이번 중요한 경영 판단일수록 다양한 내·외부 의견을 수렴해 종합적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막대한 비용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며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로펌 등 전문가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관행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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