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당신 남편이라면 당장…"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18.05.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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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막말에 유머로 응수한 처칠…스스로 '품위' 포기하는 정치인의 욕설

"내가 만약 당신 남편이라면 당장…"


2015년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은 20세기초 영국에서 벌어진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렸다. 1928년까지 영국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보수 정치인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도 그 중 한명이었다.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에게 처칠은 '공공의 적'이었다.

처칠이 정치인들의 한 디너 파티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영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이었던 낸시 에스터 여사가 처칠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라면 서슴지 않고 당신이 마실 커피에 독을 타겠어요." 한마디로 죽이고 싶다는 얘기다. 욕은 안 했지만 이쯤되면 막말이다. 화를 낼 법도 하지만 처칠은 유머로 응수했다. "내가 만약 당신의 남편이라면 서슴지 않고 그 커피를 마시겠소." 둘다 막말이지만 적어도 품위는 잃지 않았다.



영국 의회는 논쟁이 격렬하기로 유명하다. 여야가 양쪽 녹색의자에 마주앉아 상대방이 발언할 때 야유를 쏟아내는 영국 하원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때론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욕설을 하는 일은 없다. 욕설은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먹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건 심지어 상대방을 공격할 때에도 반드시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는 표현을 붙인다는 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한 스스로의 규칙이다.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가 재임시절 야당 의원의 공격을 받아치며 쓴 표현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존경하는 OOO 의원님, 의원님께서 제가 낸 세금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으셨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게 영국 정치 역사상 가장 모욕적이라고 손 꼽히는 발언의 수위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국회의원들끼리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흥분하지 않았을 때 얘기다. 일단 감정싸움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발언하는 상대편 의원에게 "그게 무슨 X소리야" "내려와 임마"라고 외치는 건 더 이상 기삿거리도 안 된다. 국정감사에선 "한국말 몰라?"와 같은 표현도 예사로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했다는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59·대구 달서구병)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여당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면서다. 당초 이 사건이 논란이 된 건 명예훼손이 아닌 '모욕' 때문이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튿날인 지난달 28일 서울역광장 집회에서 조 대표는 "핵 폐기 한마디도 얘기 안 하고 200조를 약속하는 이런 미친 XX가 어딨느냐"며 "이 인간이 정신이 없는 인간 아닌가. 미친 X아닌가"라고 했다.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진 않았지만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우리 측 당사자인 문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되는 발언이다.


조 대표가 욕설을 한 대상이 문 대통령이 맞다면 국가원수를 모욕한 셈이다.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한 발언인 만큼 '공연성'이라는 요건도 만족한다. 그러나 조 대표가 모욕죄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낮다. 현행법상 모욕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다. 문 대통령이 조 대표를 모욕죄로 직접 고소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결국 남은 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조 대표의 발언이 허위이고, 그가 허위인 줄 알면서도 발언했음을 검찰이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러려면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있었던 발언 전부를 검찰이 모두 확인해야 한다.

조 대표가 처벌을 피한다 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에서까지 자유로운 건 아니다. 비단 그의 문제 만이 아니다. 모든 정치인에게 재치있는 촌철살인까진 기대하지 않는다. 정치적 비판을 하더라도 최소한 품위는 잃지 않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정치인의 욕설에 또 한번 씁쓸한 '가정의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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