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밸리' 안 만드는 한국…기업들이 해외로 떠난다

머니투데이 강상규 소장 2018.04.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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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로드]<64>'ICO 허브'된 스위스엔 블록체인 기업들이 몰려들고

편집자주 i-로드(innovation-road)는 '혁신하지 못하면 도태한다(Innovate or Die)'라는 모토하에 혁신을 이룬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살펴보고 기업이 혁신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는 코너이다.

/그래픽=김현정 디자인기자/그래픽=김현정 디자인기자


# “카카오는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를 일본에 설립했다.”

국내 최대 인터넷과 모바일 업체가 가상통화와 블록체인 사업에 진출하면서 나란히 한국을 떠났다.

카카오는 지난달 27일 블록체인 생태계를 구축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카카오 3.0시대’ 전략을 발표했다. 그런데 블록체인 사업의 거점을 일본으로 택했다. 카카오는 연내 아시아 대표 블록체인 플랫폼을 개발한다며 한국이 아닌 일본에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를 설립했다.



앞으로 카카오가 개발하는 아시아 대표 블록체인 플랫폼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블록체인 기술 개발 및 투자도 일본에 집중되고, 또 블록체인 개발자 커뮤니티 활성화와 교육, 해커톤, 컨퍼런스 등도 자연스레 일본이 중심국이 될 것이다.

네이버도 지난 1월 말 가상통화 사업에 진출한다며 일본에 자회사 ‘라인 파이낸셜’을 설립했다고 발표했다. 라인은 일본 정부에 가상통화거래사이트 허가를 신청했고, 곧 홍콩과 룩셈부르크에서도 가상통화 사업을 운영할 계획이다.



# “글로벌 시가총액 20위에 올라있는 토종 가상통화 ‘아이콘’은 스위스에 재단을 뒀다.”

네이버와 카카오뿐만 아니라 국내 블록체인 스타트업들도 가상통화공개(ICO)를 위해 줄줄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더루프는 지난해 8월 아이콘(ICON)의 ICO를 진행하며 한국이 아닌 스위스에 재단을 두고 1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아이콘 전 세계 가상통화 가운데 시가총액 20위에 올라있다.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BS&C의 정대선 대표도 지난해 12월 가상통화 ‘에이치닥’(Hdac)의 ICO를 위해 재단을 스위스에 만들었다. 에이치닥의 ICO 모금액은 약 3000억원으로 토종 가상통화 가운데 최대 규모다.


증권 정보사이트 팍스넷의 설립자로 유명한 거번테크 박창기 회장도 지난해 6월 스위스에 재단을 만들고 가상통화 ‘보스코인’의 ICO를 진행했다. 의료정보 관리 플랫폼 메디블록의 이은솔·고우균 공동대표는 지난해 12월 영국령 지브롤터에 재단을 세우고 가상통화 ‘메디토큰’의 ICO에 나섰다.

올해 3월에만 지퍼, 인슈어리움 등 국내에서 10여개의 토종 가상통화가 투자금을 모으는 ICO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 한국을 떠나 해외에 재단이나 법인의 주소지를 두고 있다.

# “스위스는 몰려드는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으로 ‘크립토밸리’가 형성됐다.”

한국과 정반대로 스위스는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리더십을 가져가고 있다. 취리히 인근의 작은 도시 추크(Zug)는 가상통화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기업들이 몰리면서 ‘크립토밸리’(Crypto Valley)라 불린다.

과거 인터넷과 모바일, IT 스타트업들이 미국 실리콘밸리에 몰려들어 창업 생태계를 만들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들은 스위스에 몰려들어 ‘크립토밸리’를 조성하고 블록체인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스위스에 블록체인 기업들이 몰리는 이유는 가상통화와 ICO 관련 제도 및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금융감독기구인 금융시장감독청(FINMA)은 ICO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ICO 양성화를 위한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고 , 요한 슈나이더-암만(Johann Schneider-Ammann) 스위스 경제장관은 “‘크립토네이션’(Crypto Nation)이 되고 싶다”며 ICO 유치에 적극 나섰다.

회계컨설팅업체 PwC에 따르면 스위스는 지난해 조달액 기준 세계 15대 ICO 가운데 4건을 유치했다. 스위스는 전 세계 ‘ICO 허브’가 됐다.

# “정부는 ICO를 전면 금지하며 스스로 ‘블록체인밸리’ 조성 기회를 걷어찼다.”

네이버와 카카오, 국내 블록체인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국내에서 ICO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금융당국은 “기술·용어 등에 관계없이 모든 형태의 ICO를 금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ICO 전면 금지 조치는 국내 블록체인 기업을 해외로 내쫓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을 한국으로 유치할 수 있는 기회도 차버렸다.

한국블록체인협회 초대 자율규제위원장을 맡은 전하진 전 국회의원이자 전 한글과컴퓨터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들은 한국을 주시하고 있는데 정부가 오히려 기회를 걷어찼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는 ICO를 전면 금지하며 한국에 블록체인 생태계와 ‘블록체인밸리’를 조성하는 기회를 포기했고 한국은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리더십을 확보하는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지게 됐다.

# “ICO 금지는 원천적으로 블록체인의 기술개발을 막는다.”

정부는 유사수신 등 사기위험이 높고 소비자피해 확대 등의 부작용을 우려해 ICO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오히려 소를 죽인(교각살우) 꼴이 됐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가상통화 투기 근절 대책을 발표하면서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기술인 블록체인은 국내 기술개발과 산업진흥을 위해 지원·육성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가상통화 투기 근절 조치가 블록체인 등 기술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정책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ICO 전면 금지 조치가 원천적으로 블록체인 기술개발을 막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전 위원장은 정부의 ICO 금지로 블록체인 기술에 투자하는 자금 경로가 막혔다고 지적하며 ICO를 전면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창업 요람이 된 배경은 스타트업의 혁신 기술 개발에 벤처자금이 풍부하게 공급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블록체인밸리’를 조성하려면 블록체인 기술에 투자하는 자금 경로인 ICO가 원활하고 풍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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