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봉오리가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부풀고 있다.
붓이 한 획을 내려 긋기 전
점 하나 힘주어 누르는 저 잠깐을 겨울이라 부르겠다.
우듬지마다 찍어놓은 꽃봉오리를
한 무리의 말발굽 소리가 내처 달려오는 중이라 말하겠다.
오직 북쪽만 향하던 외골수가 잎보다 먼저 피운 꽃
그 낙화를 겨울이 내려놓는 잔상이라고 말하겠다.
꽃 진 자리에서 햇잎이 길어난다,
넓어지는 잎 따라 바람의 획이 굵어진다,
바람의 그림자가 먹물 스미듯 땅 위에 퍼진다,
이 가필을 봄이라 부르겠다.
말[馬]의 땀내 짙은 향기를 봄의 속도라 말하겠다.
당신 몸에서도 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어머니
봄철 내내 궁서체 'ㅣ' 내리긋기 습자 중이다.
한 획 채 내리긋지 못하고
봄 한 철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목련꽃 봉오리 같은 먹점을 화선지에 가득 채워놓았다.
보다 못한 내가 참견하는 것을 이른 봄이라 말하겠다.
어머니, 당신의 굽은 손가락 끝마디 하나 만들고
손가락 두어 마디 쭉 내리그으세요.
내 뒷머리 쓰다듬다가 냅다 내 손을 쥔 속도로 말이에요.
먹점 위에 다시 먹점을 찍어보던 어머니
굽은 채 굳은 열 손가락 끝마디를 하나하나 만져본다.
그래 이제 갈 때가 되었구먼, 어머니 혼잣말이
내 성대에 조율한 침묵을 나의 겨울이라 부르겠다.
뒷목덜미께 고이는 이 온기를 봄맞이라 말해야만 하는가.
어미 몸에서 내게로 내처 달려오는 무채색의 온기
내 몸에서 펴나므로 내가 모음이 되리라.
그때 나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쥐고
궁서체 'ㅣ'처럼 고개 숙여 한 손의 서사를 들려주리라.
- '궁서체' 전문
땀내 한 다랑이 경작하는 농사꾼과 악수할 때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악력은 삼각형의 높이이다
얼굴이 경작하는 주름의 꼭짓점마다 땀방울이 열려 있다
땀이 늙은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건
얼굴에서 발까지 선분을 그어 품의 높이를 구하기 때문
소금기를 남기며 닳는 땀방울 자국을
사람의 약력으로 출토해도 되나?
겨우내 무너진 밭두렁을 족장足掌 수로 재며
뙈기밭의 넓이를 구하던 이 허리 굽은 사내는 나의 첫 삼각형
등 굽혀 만든 앞품을 내 등에 밀착하고
새끼가 품의 넓이란 것 스스로 풀이하게 한 삼각형 공식
어린 손등에 손바닥을 밀착하여
까칠까칠한 수많은 꼭짓점을 별자리로 생각하게 한
엄지와 검지를 밑변과 빗변처럼 괴게 하여
절대 쓰러지지 않는 높이로 연필 거머쥐게 하고
내 이름자를 새 별자리 그리듯 처음 쓰게 한
피라미드처럼 몰락해버린 한 사내의 악력은, 왜 지금껏
사내의 품을 땀내로 환산하게 하는가
늙은 삼각형이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흔들어댄다
내 팔꿈치가 농사꾼의 허리 각도를 이해할 때
내 몸 통각점들이 지워진 선분을 다시 긋는다
내 이름자 획순으로 흐트러진 사내의 골격이 내 몸속에서 읽힐 때
연필심에 묻혔던 침만큼의 땀이 손바닥에 어린다
내 눈은 왜 땀에 젖은 손바닥을 꼭짓점으로 이해하는가
젖은 눈은 왜 나를 타인 되게 하는가
내가 누군가의 눈으로
그의 얼굴과 손과 발 세 변의 길이를 잰다
내가 누군가의 눈을 껌벅이며 곤혹스러워할 때
삼각형의 높이를 잴 눈물이 제자리에서 마른다
내가 이 점點에 염기를 경작하여
누군가의 발까지 이르는 높이 하나 짠내 나게 그으면
나는 누군가의 지주地主가 된다
- '나는 누군가의 지주地主이다' 전문
고향을 찾은 시인은 곧장 늙은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뙈기밭으로 간다. 무너진 밭두렁을 손보던 땀투성이의 아버지와 악수를 하지만 악력이 예전만 못하다. 순간 시인은 약해진 아버지를 통해 '어린 나'를 떠올린다. 까칠한 수염으로 어린 내 얼굴을 찌르며 손을 잡고 내 이름을 가르쳐주던 젊은 아버지의 악력을. "내 이름자를 새 별자리 그리듯 처음 쓰게 한" 그 순간을. 허리 굽은 아버지는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연신 흔들어댄다. 힘이 없다. 시인은 그것이 또 아프기만 하다. "연필심에 묻혔던 침"과 손바닥의 땀과 눈물은 무형의 삼각형이 된다. 연약해진 아버지로 인한 흘린 시인의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확인이며, 나를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된다. 나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하는 동시에 "염기를 경작"한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은 누군가의 지주, 즉 진정한 시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표제시 '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도 결국 이번 시집을 하나로 관통하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정서적 그리움을 공간적 거리로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길을 가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서 되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누군가 부르는 것은 뻔한 그리움의 거리이면서 공간이다. 내 앞의 공간만큼 뒤도 늘어나지만 그것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배지"와 진배없다. 이는 "누구도 입장할 수 없는 성역聖域"이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과거로 향했다가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순간을 떠올리곤 이내 냉정해진다. 진정한 사랑은 "그림자에 적히지 않는 감정에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와 첫 대면"(이하 '신의 감찰일기')하는, "생명 이후에서 빌려오는 박동"임을 시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이란 감정 하나만은 멀쩡"('무표정 큐브')하지만 "누군가의 지주", 즉 진정한 시인의 길을 걷기 위하여 가족에 대한 그리움마저도 멀리 한 채 시인은 스스로 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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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차주일 지음. 포지션 펴냄. 136쪽/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