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2·3·4·5번 출구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방송이 이어졌지만 자리에서 발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 4분 뒤인 오후 3시48분 훈련이 종료됐다. 승객들은 평상시처럼 지하철에 다시 올랐다. 실제가 아닌 훈련상황임을 안내받은 시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청량리역에 따르면 이날 훈련은 서울교통공사의 '역사화재 매뉴얼'에 따라 방송과 초동조치를 진행해 4분 만에 초기진화에 성공했다. 매뉴얼에는 화재가 발생하면 역 직원들은 △119 신고 △장비휴대 출동 △개찰구 비상모드 전환 △배연·제연설비 가동 △수막설비 가동(승강장 화재시) △초기진화, 승객대피와 응급구호 등을 5분 내로 실시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지하철 승강장에서 시민들의 대피를 유도하는 직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매뉴얼에 따르면 초기진화, 구조요청 등의 초동조치를 부여받은 3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직원들은 상황이 완료될 때까지 시민의 대피를 도와야 한다.
이번 훈련에 참여한 청량리역 직원들은 7명이었다. 즉 4명은 시민들의 대피유도에 나서야 했지만 이들은 모두 역무실 앞에서만 대피시키는 훈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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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청량리역은 전국적으로 노인 이용객이 가장 많은 지하철역이다.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이 하루 평균 1만98명이나 이용했다. 이날 역시 승강장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사고가 발생했을 때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을 신속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게 핵심이다. 평소 형식적인 훈련으로는 비상상황이 터졌을 때 제때 대응하기 어렵다.
직원들의 안일함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안전불감증도 문제다. 역을 빠져나가는 승객을 제외하고 훈련에 동참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역무실에서 화재 발생 대비 훈련을 하겠다는 예고 방송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김모씨(76)는 "다들 가만히 있어서 훈련일 거라고 예상했다"며 "진짜로 불이 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지하철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취재진과 함께 훈련과정을 지켜본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이게 훈련이냐"며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