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목(同想異目)] 내로남불, 역지사지

머니투데이 이진우 더벨 부국장 겸 산업부장 2018.01.03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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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목(同想異目)] 내로남불, 역지사지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데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뀐다. 횡단보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속도를 줄이면서 또는 잠시 멈춘 상태에서 그냥 지나쳐버릴까 고민한다. 때마침 앞서가던 차가 쏜살같이 달려나가면 신호를 무시하고 같이 내뺀다. 그러곤 잠시 뒤 아차 한다. 감시 카메라가 있었나, 없었나. 사실 고민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되는 법규 준수의 문제지만 한두 번쯤 안 해본 사람 없다. 반대로 보행자 입장에서 길을 건너려다 어떤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앞을 지나가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다.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아예 운전할 생각을 않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단속에 걸릴까 걱정부터 한다. 피할 수 있다면 운전을 하겠다는 얘기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의 대표적 사례가 운전 습관이다. 앞차가 너무 늦게 가면 바짝 붙어서 빵빵거리고 뒤에서 바짝 따라붙으면 신경이 쓰여 또다시 불평을 해댄다. 역지사지는 온데간데없다.



운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되는 ‘고민거리’가 갈수록 늘고 있다. 사고와 행동도 수시로 바뀐다. 운전석에 있을 때는 강자지만 보행을 할 때는 약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반응한다. 심지어 운전석에 앉아서도 앞차에는 강자, 뒤차에는 약자의 태도를 보인다. 실은 강자이면서 아쉬울 땐 “내가 정말 약자”라고 우기는 일이 다반사다. 남이 하면 날 선 비판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본인, 자기 주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심지어 같이 그 고민을 무시하거나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곤 기뻐한다.

대학교수들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해로 꼽은 2017년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촛불정국을 거쳐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조기대선 등 역사적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지난해 사람들은 운전석에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신호 위반과 법규 준수를 번갈아 외치곤 했다. 저주에 가까운 인터넷 댓글 속에 이 같은 현상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정치·사회적으로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적폐니 친북좌파니 하며 손가락질하지만 양쪽 모두 정작 자신이나 주변인을 둘러보면 적잖은 공통분모가 있다. 정의를 정치적 구호처럼 부르짖고 도덕군자인 양 남들을 꾸짖다가 정작 청문회에 나와 자신과 가족들이 탈탈 털리는 것을 보면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앞선다.



내로남불은 재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재벌을 적폐로 규정하고 청산의 대상이라고 날을 세우면서도 정작 본인이나 자식이 그곳에 취직하면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존경하는 기업인’에 오르내리는 재벌총수 중 상당수는 인터넷 댓글 상에서 이미 ‘구속되어야 마땅한’ 인물들이다. 대기업 귀족노조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구성원들은, 그 가족들은 노조의 ‘활약’을 기대하고 ‘결과물’에 내심 박수를 보낸다.

2018년 무술년 역시 정유년에 이은 역사적 변혁기의 연속이다. 세대교체, 책임경영, 미래성장, 혁신 등 이미 익숙한 경영방침이 신년사에서 쏟아져 나온다. 세대교체는 부의 대물림, 책임경영은 아랫사람 솎아내기 등 보기에 따라 해석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내는 것은 올해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만이 옳다는, 도를 넘는 공격 일변도의 주장은 역공을 부른다. 운전석에선 보이지 않던 것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로 바뀌면 한눈에 보이고 다시 운전석에 오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2018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는 ‘역지사지’가 후보에라도 좀 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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