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없는 별감? ‘노는 남자’ 혹은 ‘패셔니스타’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7.11.04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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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69 – 별감 : 조선의 뒷골목 유흥문화를 이끌다

존재감 없는 별감? ‘노는 남자’ 혹은 ‘패셔니스타’


요즘 같은 ‘사극 비수기’에는 곶감 빼먹듯이 비축해둔 설을 풀어보자. 역사물을 보면 대사 한 마디 없이 서있거나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국 사극에서는 임금, 양반, 귀족 등 지배층이 으레 주인공을 맡아왔다. 최근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백성이나 노비의 비중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감 없는 그들은 누구일까?

예컨대 조선시대 별감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사극 속 궁궐 장면을 보면 붉은 옷 입고 초립을 쓴 사내들이 공연히 임금 주변을 서성인다. 내관, 궁녀들이야 뭐 하는 사람인지 감이 오지만 이 자들은 도무지 정체불명에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궁궐에서는 분량도 없고 단지 구색만 맞추는 별감들이 알고 보면 조선의 뒷골목에서 힘깨나 썼다는 거!



별감은 궁중 액정서(掖庭署)에 소속된 잡직이었다. 액정서는 왕명의 전달, 궐문 열쇠 관리, 궁궐 설비 점검 등의 임무를 맡았다. 말 그대로 잡다한 일이다. 그렇다고 별 볼 일 없었느냐? 예나 지금이나 힘은 조직 내 직급보다는 권력자와의 거리에서 나온다. 액정서 별감은 양반이 아니었지만 임금을 곁에서 모셨다. 그들을 함부로 볼 수 없는 이유다.

별감들은 양지에서 음지를 지향했다. 이 자들의 진가는 사극이 깍두기로 비추는 궁궐이 아니라 폭력과 유흥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드러난다. 송만재의 한문시 ‘관우희’에서는 별감을 ‘붉은 옷에 초립을 쓴 장안의 왈자(曰者)’로 묘사하고 있다. ‘왈자’는 말과 행동이 거친 화류계 인사를 말한다. 그래서인지 실록에 나타난 별감의 행실은 깡패나 진배없다.



“별감 송정희가 예닐곱 명의 불량배들과 창녀의 집에 모여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지르는데, 술과 고기가 질펀하므로, 본부의 관리가 붙잡으려 하자 피하여 숨어버렸습니다. 비록 경미한 일이지만 기강의 문제이니 잡아들여 징계하시기 바랍니다.”

숙종 35년(1709)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몇 년 후에는 한 별감이 종친에게 욕을 하다가 얻어맞자, 동료 20여 명을 몰고 찾아가서 몰매를 가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종친은 임금의 친척으로 지체 높은 신분이다. 아전에 불과한 별감이 손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별감들은 종친이고, 사헌부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별감은 ‘노는 남자’였다. 언행이 거칠기는 했지만 풍류도 제법 알았다. 저자거리의 유흥문화를 주도한 게 이 자들이었다. 19세기 풍물가사 ‘한양가’는 당시 서울을 풍미한 놀이 가운데 ‘승전놀음’을 으뜸으로 쳤다. 여기서 ‘승전(承傳)’은 왕명을 전달한다는 뜻으로 이 놀음의 주역이 별감임을 알 수 있다.


승전놀음은 별감들이 경치 좋은 정자에서 개최했다. 휘장, 차일, 오색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무대에 장안의 이름난 기생들이 소개와 함께 등장하면 놀이판이 막을 올렸다. 악공들이 거문고, 해금, 피리, 장구로 풍악을 울리고 소리꾼들이 가사, 잡가, 시조를 목청껏 부르면서 흥이 고조된다. 기생들의 북춤과 검무에 놀이판은 절정으로 치달으며 대미를 장식했다.

별감은 유흥문화의 기수답게 당대의 ‘패셔니스타’이기도 했다. ‘한양가’가 묘사한 별감의 복장은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상투에 꽂는 동곳은 꿀이 엉긴 것 같은 밀화호박을 썼고, 망건 줄을 거는 관자는 외점박이 거북 등껍질로 만들었다. 붉은 옷은 삶지 않은 명주실로 짠 최고급 비단이었으며, 초립도 궁중 상의원에서 직조한 귀한 천으로 안을 받쳤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별감으로서 명성을 떨친 자는 누가 있을까? 금사(琴師), 즉 거문고의 스승이라는 이원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악공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거문고 신동으로 알려졌다. 17세에 궁중의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는 장악원 별감이 되었는데, 훤칠한 미남인데다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 장안의 기생들이 흠모하는 기린아로 떠올랐다.

이원영의 거문고 실력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세자는 이 별감을 가까이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문고를 연주하게 했다. 그의 솜씨는 더욱 신묘해졌고 덕분에 품계가 정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어진 정치를 펴려 한 효명세자가 21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이원영의 인생도 꼬이기 시작했다.

그 후 궁궐을 떠나 거문고 교습소를 차렸지만 그의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기방에 드나들면서 여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살았다. 고관대작들의 잔치에 불려 다니며 모은 재물도 기생들에게 갖다 바치기 바빴다. 본가에 쌀이 떨어졌다는 부인과 아들의 호소는 외면한 반면 푹 빠진 어린 기생에게는 집까지 사주기도 했다.

난봉꾼의 행로가 순탄할 리 없다. 결국 재산 다 빨리고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화류계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이원영은 정인에게 버림받고 쫓겨났다. (요즘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겠지만) 그는 본처에게 돌아갔다. 염치없는 탕자를 품어준 부인이 ‘대인배’랄까. 말년에는 간신히 입에 풀칠하면서 거문고를 뜯었다고 한다. 평생 남편의 소리를 들은 아내가 흥얼거리며 비평하자, 어리석은 별감은 뒤늦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 늙은 뒤에야 조강지처와의 즐거움을 알았다.”

별감은 조선 후기에 도시가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확산되며 나타난, 유흥문화의 총아였다. 유교윤리와 신분질서에 억눌린 조선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면서 저마다 문화적 욕구를 발산하려고 했다. 별감들의 승전놀음과 복장에는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그 시절의 유행이 담겨 있다. ‘노는 남자’ 혹은 ‘패셔니스타’로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 한 옛 사람들의 로망 말이다. 물론 여기엔 패가망신의 위험도 따른다, 누구처럼.

사극에선 존재감이 없지만, 별감의 정체를 안다면 드라마 보는 재미가 더 쏠쏠하지 않을까. 임금 뒤에 서서 오늘 밤엔 뭐 하고 놀까, 궁리하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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