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사람과 자연, 그 조화로운 삶을 위한 고민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7.07.22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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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배한봉 시인 ‘주남지의 새들’

[시인의 집] 사람과 자연, 그 조화로운 삶을 위한 고민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한 배한봉(1962~ ) 시인은 다섯 번째 시집 ‘주남지의 새들’ 첫머리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인간 삶과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 생명력의 본질적 순수를 향한 도정에 내 시가 있기를 나는 늘 소망한다”며 “이 시집이 보듬고 있는 사랑과 눈물, 혹은 햇볕과 바람이 한 사람이라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면, 우리 삶에 윤기를 더할 수 있다면 나는 조금이나마 누추함을 벗을 것”이라고 밝혔다.

등단 이후, 묵묵히 ‘생태시의 외길을 걸어온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실제 삶의 공간인 우포늪과 주남저수지를 배경으로 사람과 자연의 공존에 관한 시를 지속해서 쓰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주남저수지의 수련, 돌다리뿐 아니라 감포 깍지길, 보도블록 틈의 괭이밥풀, 꽃샘바람이 다녀간 뒤의 목련, 쭈글쭈글한 감자 몇 알, 부엌 구석 자루에 담긴 고구마, 용추계곡 숲길에서 만난 토끼, 늙은 산벚나무 등과 같이 삶에 근거한 자연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해 지는 하늘에서 주남저수지로
새들이 빨려 들어오고 있다, 벌겋다, 한꺼번에 뚝뚝, 선지빛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살점 같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저 장관
창원공단 퇴근길 같다



삶이 박아놓은 가슴팍 돌을 텀벙텀벙 단체로 시원하게 물속에 쏟아내는 몸짓 같다, 온몸으로 그렇게
삶을 꽉 묶어놓은 투명한 끈을 풀고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들,
그 질펀한 힘이 선혈 낭자한 시간을 주남저수지 물바닥에까지 시뻘겋게 발라놓았겠다

장엄하다, 이 절정의 파장
삶의 컴컴한 구덩이조차도 생명의 공명통으로 만들 줄 아는
저 순하고 아름다운 목숨들,
달리 비유할 것 없이 만다라의 꽃이다

저 꽃 만져보려고 이제는 아예 하늘이 첨벙 물속에 뛰어드는 저녁이다
- ‘주남지의 새들’ 전문



이번 시집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주남지의 새들’은 해질 무렵 새떼가 주남저수지로 날아드는 장관을 창원공단에서 퇴근하는 가장들에 비유하고 있다. 새들이 먹이를 잡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창원공단에서 일하는 가장들의 노동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또한 “선지빛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살점" 같은 새들의 하강은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는 가장들이 “삶이 박아놓은 가슴팍 돌을 텀벙텀벙 단체로 시원하게 물속에 쏟아내는 몸짓”이라 하여 사람과 자연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정화해주는 저수지는 “삶의 컴컴한 구덩이조차도 생명의 공명통으로 만들어 주는" 고마운 존재이면서 “달리 비유할 것 없이 만다라의 꽃”이다. 새(생명), 물(땅), 하늘이 삼위일체를 이뤄 진리, 혹은 우주를 상징하는 “만다라의 꽃”은 “덤불 언덕을 우주의 붉은 중심으로 만든 저기 저 천의무봉의 알”(‘알’)이나 “지구의 목덜미에 찍힌 우주의 지문”(‘붉은 달’)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은 물 위에 떠서 하늘을 지상을 연결해주는 ‘수련’의 존재와도 연결된다.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수련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심장”(이하 ‘수련의 아침’)으로 “진흙 바닥 같은 삶을 심장으로 가져본 자들”을 위무하고 있다.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 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 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 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 ‘복사꽃 아래 천 년’


소월문학상 수상작인 이 시는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세계관을 뛰어난 솜씨로 형상화하고 있다.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떨어져 쌓인 복사꽃잎을 본 시인의 상상력은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여자아이-어머니-할머니가 “쌓인 꽃잎 속에서” 걸어 나온다는 것은 시간의 연속성이나 삶의 윤회를 의미한다. 신발이나 복사꽃은 천 년 전에도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 3연의 파문-허공-우주로의 확장은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즉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만다라의 꽃”과 같은 고귀한 여정이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가만가만 천 년” 동안 조용히 따라가면 되는 깨달음의 길이다.

그 길을 찾는 첫 번째는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이하 ‘빈 곳’)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운 허점”인 틈을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 외면한다. 틈은 언제든 “팔을 벌려 안을 준비가 돼" 있지만 살기에 바빠 “자기 가슴 한쪽을 비워놓지” 못한 채 자꾸 채우려 한다. 땅과 하늘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은 틈과 상통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하여 틈이며 상처인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르는" 것은 당연하다. 산다는 것은 “상처에 살이 차오르는" 것, ‘빈 곳’에 사랑을 채우는 일이다. ‘빈 곳’에 꽃을 피우고, “물이 아픈 세계에서 살 수 없는”(‘강의 이마를 짚어주는 저녁 어스름’) 그를 생태 시인이라 한정하기보다 “한 걸음이 세계를 만들어 내는”(‘한 걸음의 평등’) ‘자연시인’이라 불러야 맞을 것만 같다.

◇주남지의 새들=배한봉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36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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