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몸에 고인 어둠을 찍어 시를 쓰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7.06.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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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손병걸 시인 ‘통증을 켜다’

[시인의 집] 몸에 고인 어둠을 찍어 시를 쓰다


온통 ‘소리’와 ‘어둠’의 통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시인이 있다. 몸 안에 고여 있는 어둠은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몸 밖에 스멀거리는 소리는 몸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손병걸(1967~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통증을 켜다’는 시인의 말처럼 “슬픔 한 짐”과 묵직한 통증을 지고 “가도 가도 도무지 끝이 없”는 길을 멈추지 않고 가는 어두운 발소리 같다.

손병걸,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20여 년 전, 몸 안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 남았다. 시가 희망이었다. “몸속 깊이 고인 어둠”(이하 ‘묵화를 그리며’)을 찍어 쓴 시로 구상솟대문학상, 민들레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전국장애인근로자문학상 등을 받았다. “고이다 끝내 넘친 어둠”에 “까맣게 젖은 깃털”을 세운 시인에게 “어둠보다 선명한 것”은 이제 없다. “새파란 하늘에 어둠이 번져갈 무렵”(이하 ‘점핀’)이면 시인은 “몹시 그리운 한 사랑을 떠올리며” 점핀을 잡고 “어젯밤 내내 못다 걸은 발소리”를 찍는다. 어둠과 소리는 그의 시를 지탱해주는 두 기둥과 같다.



틈이란 틈을 다 비집고 날아오르는
커피포트 속 물소리처럼
모든 날갯짓은 다 뜨거운 걸까

시력을 잃고 엎질러진 물처럼
내 생이 밑바닥 밑바닥으로 스미는 동안
오래전 몸속에서 식은 시간이 끓어오른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하늘과 땅 사이
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고
투명한 벽은 점점 두께를 키웠을까

뜨겁고 서늘함이 한바탕 뒤엉키며
고인 시간이 비등점에 이를 즈음
커다란 날개 한 쌍이 활짝 펴진다

적절한 온도의 바람이 불고
모든 틈이 사라진 여기가 바로
내가 간절히 원한 절정
그러나 지금은 잠시
펼쳐진 날개를 접어야 할 때


커피포트의 전원을 끄고
한껏 벌어진 생각을 메우듯
스물네 시간 쉬지 않을 내 몸에 전원을 켠다
- ‘물이 끓는 시간’ 부분


시력을 잃은 시인에게 소리는 몸 안의 어둠을 자극하는 촉매제인 동시에 몸에 빛을 가져다주는 매개체이다. 소리를 만난 어둠은 기억을 더듬어 색을 갈아입는다. 몸의 빈칸을 채운 어둠은 “비어 있지 않다는 드넓은 소리/ 밤하늘에 빛나는 시공의 소리”(이하 ‘빈칸’)를 만나 “언제나 꽉 찬 공명/ 먹먹하게 환한” 시를 쓸 수 있게 해주는 뜨거운 날갯짓이 된다.

시 ‘물이 끓는 시간’에서 “커피포트 속 물소리”는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 떼 소리와 같다. 허공을 가득 채워 “틈이란 틈을 다 비집고 날아오르는” 부러운 날갯짓과 다름없다. 이에 반해 시인은 “시력을 잃고 엎질러진 물”과 같다. 하지만 시인은 좌절하지 않는다. “내 생이 밑바닥 밑바닥으로 스미는 동안/ 오래전 몸속에서 식은 시간이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가벼움과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무거움은 갈등의 골을 깊게 한다. 그 골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모든 틈이 사라진” 절정, 즉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시인은 상승과 하강의 교차점에 이르러 “지금은 잠시/ 펼쳐진 날개를 접”고 쉬어야 할 시간임을 감지한다. 몸에 들어온 소리가 빛을 주기도 하지만 소음이라는 어둠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파서 더불어 내가 아파서
눈물 흘리던 기도는 끝났다
목젖이 부은 당신을 위해
대신 울어도 괜찮다는 말
그 기도 기도 기도는 거짓말
그리하여 사랑은 먹구름 속에 갇혀 있고
체온과 체온 사이에서 증발해버린
온몸에 말라붙은 소금 알갱이를 털어내며
나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한다
해와 달이 죽고 별들이 죽고
이미 죽은 것이 다시 죽었듯
잎사귀 없는 무화과나무에는
발갛게 익어갈 열매가 없다
- ‘보편적인 기도’ 부분

매미 소리 사그라지는
자정 무렵

일백오십억 광년을 날아온
별빛 한 가닥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 ‘사랑’ 전문


“두 손 모아 기도”를 했음에도 “은밀히 감춰온 곰삭은 사랑”(‘옆구리’)은 “먹구름 속에 갇혀 있”다. “당신이 아파서 더불어 내가 아파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음에도 “체온과 체온 사이에서 증발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여윈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 다시 죽”는 듯한 극한의 고통이다. “별빛 한 가닥/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희망의 별은 절망의 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비 갠 후’)됨을 아는 시인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표제시 ‘하얀 도화지의 소리’에서 보듯, “빠끔히 열린 방문 사이로/ 딸아이 그림 그리는 소리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소리”가 “소나무 두루미 해바라기 바다가 되어/ 형형색색 살아”나듯 딸아이로 인해 희망이 되살아난다. 비록 산동네 지하방일망정 “휘영청 떠오른 무지갯빛 향기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시인을 지탱시켜주는 힘은 사랑하는 딸아이(가족)와 “시력 없는 내 생활의 활자”(‘점핀’)로 한 자 한 자 새긴 ‘겨울나무 한 권’일 것이다. 어쩌면 이번 시집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몸 안의 어둠과 피를 찍어 쓴 절절한 사랑노래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의 집] 몸에 고인 어둠을 찍어 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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