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해고, 친구의 죽음…삶이 바닥일 때, 걷기 시작했어요"

머니투데이 박다해 기자 2017.04.29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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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 새책] 크리스티네 튀르머 '생(生)이 보일 때까지 걷기'

"갑작스러운 해고, 친구의 죽음…삶이 바닥일 때, 걷기 시작했어요"


지금부터 제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저의 '걷기 실험'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이 책에서 제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한번 귀 기울여 주세요.

"귀하의 업무는 현시점에서 종료됩니다." 사장은 내 눈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죠. 그렇게 하루아침에 전 백수가 됐어요. 얼굴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쏟았죠. 한참을 울고 난 뒤 찬물로 세수하고 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길)에 도전할 시기 아닐까 하고 말이죠.



오랜 친구 베른트의 죽음은 결심을 굳히게 했어요. 고급 펜트하우스에 살고 메르세데스를 끌고 다니던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죠. 나이 마흔여섯에요. 나는 사람이 마흔여섯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내 나이 서른 여섯. 만약 남은 삶이 10년뿐이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적어도 일과 돈벌이는 아니었어요. 그의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PCT 종주를 준비했어요.



원래 운동을 잘했느냐고요? 전혀요. 체육 시간엔 늘 꼴찌 후보였어요. 쓸모없는 뱃살이 5kg은 족히 될 걸요.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4277km를 완주한다는 도전 자체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지 몰라요.

그래도 기왕 결심한 것, 일단 떠납니다. '초경량' 법칙으로 꾸린 6kg짜리 배낭을 달랑 들고요. 그리고 끝없이 걷고 또 걸었죠. 5개월 동안요. 기적처럼 완주했어요. 이후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과 '애팔래치아 트레일'(AT)을 모두 정복했죠.

동남아시아로, 호주와 유럽으로 8년 동안 쉼 없이 여행을 다녔어요. 한국도 다녀왔답니다. 25켤레의 신발에 구멍이 났죠. 내가 먹은 초콜릿만 0.5톤에 달할 거예요. 2000일이 넘는 밤을 혼자 텐트에서 보냈죠. 때론 걷기 대신 자전거나 카누 여행도 했어요.


이 책은 처음 3번의 트레일에 대한 기록이에요. 사막의 열기도, 쏟아지던 비도, 눈 덮인 고개나 거센 계곡물도, 곳곳의 방울뱀과 흑곰까지도 이겨낸 기억이죠. '걷기' 이후에 뭐가 달라졌냐고요? 현실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제가 바라보는 행복의 기준이 달라졌을 뿐이죠. 이 모든 걸 이겨냈는데 무엇이 날 가로막을 수 있겠어요?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죠. 그래도 전처럼 두렵진 않아요.

◇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크리스티네 튀르머 지음. 이지혜 옮김. 살림 펴냄. 452쪽/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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