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강진 다산초당에 가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7.04.0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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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다산의 자취를 따라나선 남도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산초당 모습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다산초당 모습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4월이 열렸다. T.S.엘리엇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고 읊은 그 4월이다. 시인의 역설처럼 4월은 죽은 땅을 밀고 올라온 온갖 생명이 꽃을 피우는 달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폭죽처럼 터지는 꽃들의 잔치. 어지간히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도 그냥 앉아있기는 어려운 계절이다.

남도로 간다. 꽃을 보러 가는 게 아니고 시간을 거슬러간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세상, 오늘을 살아갈 지혜 한 자락 얻을까 싶어 옛사람의 그림자를 찾아간다. 전남 강진은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짙게 남아있는 땅이다. 역경 속으로 던져졌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 고난 속에서 더욱 화려한 꽃을 피워낸 사람…. 남쪽으로 갈수록 땅은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붉은 속살을 흔연하게 내놓는다. 그 끝머리, 바다가 저만치 손짓하는 곳에 유배 시절 다산이 머물던 집이 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대숲의 서걱거리는 소리로부터 시작한다. 새들을 품은 숲이 통째로 지저귄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도열한 길에는 나무뿌리들이 온통 얽혀 있다. 땅속에 있어야 할 몸을 지상에 드러낸 뿌리들은 생채기투성이 손을 뻗어 땅을 움켜쥐고 있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흙이 아니라 생을 향한 열망이다. 삶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장애물을 이기는 방법은 좌절하고 원망하고 울부짖는 게 아니라 꿋꿋이 일어서서 걸어가는 것이다.

다산이 그랬다. 그는 평생 5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그중 대부분의 책들이 가장 불행했던 18년의 강진 유배 시절에 쓴 것이다. 서·예·악·춘추·주역·천문·지리·산술·의술·금석학을 섭렵했던 다산을 말하기에는 그가 너무 크다. 200여 년 전 그가 걸었던 길을 묵묵히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벅차고 숨이 가쁘다. 길가 도랑에는 겨울이 녹은 물이 졸졸거리며 흐른다. 다산도 봄마다 이 소리를 들었겠지. 원래는 어둡고 습한 길인데 오늘은 햇살이 따사롭다.



다산초당은 체로 친 듯 곱게 내리는 햇살 아래 묵묵하게 서 있다. 새들도 햇살을 한 가닥씩 물고 이 나무 저 나무 옮아 다닌다. 초당은 여전히 와당(瓦堂)이다. 원래 작은 초가였는데, 허물어진 것을 1957년 다시 지으면서 기와를 덮은 것이다. 다산이 거주하기 전에는 해남 윤씨 가문에서 산정(山亭)으로 쓰던 곳이다. 윤선도를 배출한 해남 윤씨와 다산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의 모친이 바로 그 집안 출신이다. 그러니 비록 유배 중이라 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을 것이다. 주막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해 몇 곳을 전전하던 다산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이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넓은 돌이다. 다산이 찻물을 끓였다는 다조(茶俎·차 부뚜막)다. 뒤뜰에는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샘 약천(藥泉)이 있다. 다산은 이 물로 차를 끓였다. 왼편 산비탈로 올라가면 다산이 바위에 손수 쓰고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한 획 한 획에서 옛사람의 고독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있는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에 들른다. 연못 한가운데 돌로 산을 쌓고 대롱으로 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이들 네 가지가 이른바 다산사경(茶山四景)이다.

동암을 지나 천일각으로 간다. 다산이 초당에 거주할 때는 없었던 정자다. 이곳에서는 강진만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다산 역시 이 언덕에서 바다를 자주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닷물은 가장 따르는 형이자 지기였던 정약전(丁若銓)이 있는 흑산도를 쉽게 오갈 수 있었을 테니. 형제는 의금부를 출발해서 나주까지 유배 길을 함께했다. 하지만 나주 율정주막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해야 했다. 음력 11월이었으니 바람이 매서웠을 것이다. 그들은 그 후 그리움을 뼈에 새기면서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바닷물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엎드려 있고 봄을 부려놓은 바람은 부드럽다. 눈앞의 늙은 낙락장송이 참았던 옛이야기라도 들려줄 듯 가지를 흔든다. 다산도 여기 서서 형을 그리워했겠지. 임금 걱정 나라 걱정도 했겠지. 그 어느 때보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가 절실한 시대, 옛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오랫동안 귀를 기울인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강진 다산초당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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