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꽃과 나비의 사랑학 개론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7.04.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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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오늘 시인 '나비야, 나야'

[시인의 집] 꽃과 나비의 사랑학 개론


2006년 계간 ‘서시’로 등단한 오늘 시인(1970~ )의 첫 번째 시집 ‘나비야, 나야’는 꽃을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바람 같은 나비와 한 곳에 붙박여 떠날 수 없는, 겉만 화려하고 속은 상처투성이인 꽃의 조응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천착한다. 꽃은 몽우리일 때부터 꽃 진 자리까지 송두리째 보여주지만 나비는 가장 화려한 순간의 꽃만 탐한다. 목적을 달성한 나비는 한순간에 떠나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꽃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꽃이 나비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바람의 방향을 놓치고 있다는 것 바람의 방향을 놓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뿌리를 들킬 수도 있다는 것 바람을 타기 위해 서둘지만 않는다면 들키지 않는 약속을 나눌 수 있는 것 나를 핥아 줘, 꽃대를 내밀면 나비의 발가락은 혀보다 부드러워 입술을 놓친 조바심은 그저 가벼운 바람 과거형의 아름다움으로 나비의 눈을 바라보지 말 것 완료된 진실이 품고 있는 독성에 눈멀지 않기 위해 요동치는 뿌리를 잠재울 것

물어뜯은 손톱을 뱉은 자리마다 멍이 피어나는
나비의 집중
- ‘숨’ 전문




이 시는 꽃과 나비의 상관관계를 들숨과 날숨이라는 생명현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꽃이 나비에게만 집중할 때 간과해선 안 될 것이 ‘바람의 방향’, 그 방향을 놓쳐 “부끄러운 뿌리를 들킬 수도 있”지만 바람을 제대로 타고 “서둘지만 않는다면 들키지 않는 약속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나비에게 사랑의 약속은 “그저 가벼운 바람”일 뿐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손톱을 물어뜯은 자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집중하는 것이 나비다. ‘부끄러운 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지 않는 꽃(여성)에 비해 나비(남성)는 ‘요동치는 뿌리’를 잠재우지 못한다.

표제시 ‘저울을 베고 눕는 것들’도 ‘저울’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사람은 “네가 내 몸에 오르면/ 제로였던 시간들이 깨어나”고 “화려한 저녁 식탁” 같은 시간을 보낸다. 문제는 지켜지지 않는 약속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 “네가 내려간 자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무게의 흔적”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너와 내가 나누었던 사랑이/ 0은 아니라”고 자위한다. 사실 너무 소극적인 화자의 태도에 “조금 비뚤어진 눈금”만큼이나 아쉽고 아프다.



웃어봐 꽃을 그릴 수 있게 그래야 잎이 마르질 않지 불이 앉은 자리마다 꽃으로 채워줄게

오늘은 왼쪽 뺨에서 턱까지 레드썬보로니아를 심을 거야 내 꽃이 당신에게로 건너가면 수군거리는 말들을 지날 수 있어

어제는 어린 아가씨가 애인의 이름을 어깨에 새겨달라고 왔었지 바람이 고여 있는 골목을 돌아 미간이 좁은 오후를 더듬거리면서 오는 동안 당신을 맡았을 거야


꽃의 날들이 지나면, 꽃 같은 애인의 이름 위로 시간이 번져 시들거라는 걸, 눈물에 데어 흉터가 된 이름을 다시 내게로 가져올 것을 알기에 슬펐어 그땐 그녀의 흰 어깨에 긴 속눈썹을 그려줄래

뜨거운 한낮이 지나고 등에서 자고 있는 나비가 깨어나기 전 당신의 상처도 잠들었으면 좋겠어
- ‘화상’ 전문


최근에 발표한 시 ‘화상’은 불안과 상처,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시는 문신사가 화상을 입은 상처에 문신을 하고자 찾아온 ‘당신’에게 잔잔히 들려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미 여러 번 찾아온 당신과 좀 친해진 문신사는 “꽃을 그릴 수 있게” 웃어보라 한다. “그래야 잎이 마르질 않”는다는 것. 그는 “왼쪽 뺨에서 턱까지 레드썬보로니아”를 새긴다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리는 말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3, 4연은 문신을 새기면서 “애인의 이름을 어깨에 새겨달라고 왔”던 ‘어린 아가씨’의 사연을 들려준다. “꽃의 날들이 지나면”, 즉 서로 좋았던 시절이 지나면 “눈물에 데어 흉터가 된” ‘애인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슬펐다면서 “그땐 그녀의 흰 어깨에 긴 속눈썹을 그려줄” 것이라 한다. 눈물을 다 감추고도 남을 속눈썹을 그려준다는 것.

문신사는 “뜨거운 한낮이 지나고 등에서 자고 있는 나비가 깨어나기 전 당신의 상처도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나비의 남성성으로 생긴 상처는 다른 나비가 아닌 꽃의 여성성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상이 화상(火傷)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당신인 ‘어린 아가씨’처럼 사랑했던 사람에게 덴 상처일 수도 있기에 기존 품종보다 색깔이 더 선명하고 수명도 오래가는 신품종 ‘레드썬보로니아’를 몸에 새겨 치유와 새 출발을 기원하는 것이다.

시집 전반에 녹아 있는 수동적인 여성성은 “여자 말고 어른이 되고 싶은”(‘양파 속엔 나비 한 마리’) 통과의례일 것이다. “잠시라는 말과 오랫동안이라는 말의 시간이 같다”(‘그 순간의 모든’)는 것을 깨닫는 순간 꽃은, 시인은 꽃 진 자리와 지켜지지 않는 약속과 바람 같은 나비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으리라.

◇나비야, 나야=오늘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16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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