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나비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바람의 방향을 놓치고 있다는 것 바람의 방향을 놓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뿌리를 들킬 수도 있다는 것 바람을 타기 위해 서둘지만 않는다면 들키지 않는 약속을 나눌 수 있는 것 나를 핥아 줘, 꽃대를 내밀면 나비의 발가락은 혀보다 부드러워 입술을 놓친 조바심은 그저 가벼운 바람 과거형의 아름다움으로 나비의 눈을 바라보지 말 것 완료된 진실이 품고 있는 독성에 눈멀지 않기 위해 요동치는 뿌리를 잠재울 것
물어뜯은 손톱을 뱉은 자리마다 멍이 피어나는
나비의 집중
- ‘숨’ 전문
표제시 ‘저울을 베고 눕는 것들’도 ‘저울’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사람은 “네가 내 몸에 오르면/ 제로였던 시간들이 깨어나”고 “화려한 저녁 식탁” 같은 시간을 보낸다. 문제는 지켜지지 않는 약속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 “네가 내려간 자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무게의 흔적”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너와 내가 나누었던 사랑이/ 0은 아니라”고 자위한다. 사실 너무 소극적인 화자의 태도에 “조금 비뚤어진 눈금”만큼이나 아쉽고 아프다.
오늘은 왼쪽 뺨에서 턱까지 레드썬보로니아를 심을 거야 내 꽃이 당신에게로 건너가면 수군거리는 말들을 지날 수 있어
어제는 어린 아가씨가 애인의 이름을 어깨에 새겨달라고 왔었지 바람이 고여 있는 골목을 돌아 미간이 좁은 오후를 더듬거리면서 오는 동안 당신을 맡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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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날들이 지나면, 꽃 같은 애인의 이름 위로 시간이 번져 시들거라는 걸, 눈물에 데어 흉터가 된 이름을 다시 내게로 가져올 것을 알기에 슬펐어 그땐 그녀의 흰 어깨에 긴 속눈썹을 그려줄래
뜨거운 한낮이 지나고 등에서 자고 있는 나비가 깨어나기 전 당신의 상처도 잠들었으면 좋겠어
- ‘화상’ 전문
최근에 발표한 시 ‘화상’은 불안과 상처,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시는 문신사가 화상을 입은 상처에 문신을 하고자 찾아온 ‘당신’에게 잔잔히 들려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미 여러 번 찾아온 당신과 좀 친해진 문신사는 “꽃을 그릴 수 있게” 웃어보라 한다. “그래야 잎이 마르질 않”는다는 것. 그는 “왼쪽 뺨에서 턱까지 레드썬보로니아”를 새긴다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리는 말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3, 4연은 문신을 새기면서 “애인의 이름을 어깨에 새겨달라고 왔”던 ‘어린 아가씨’의 사연을 들려준다. “꽃의 날들이 지나면”, 즉 서로 좋았던 시절이 지나면 “눈물에 데어 흉터가 된” ‘애인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슬펐다면서 “그땐 그녀의 흰 어깨에 긴 속눈썹을 그려줄” 것이라 한다. 눈물을 다 감추고도 남을 속눈썹을 그려준다는 것.
문신사는 “뜨거운 한낮이 지나고 등에서 자고 있는 나비가 깨어나기 전 당신의 상처도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나비의 남성성으로 생긴 상처는 다른 나비가 아닌 꽃의 여성성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상이 화상(火傷)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당신인 ‘어린 아가씨’처럼 사랑했던 사람에게 덴 상처일 수도 있기에 기존 품종보다 색깔이 더 선명하고 수명도 오래가는 신품종 ‘레드썬보로니아’를 몸에 새겨 치유와 새 출발을 기원하는 것이다.
시집 전반에 녹아 있는 수동적인 여성성은 “여자 말고 어른이 되고 싶은”(‘양파 속엔 나비 한 마리’) 통과의례일 것이다. “잠시라는 말과 오랫동안이라는 말의 시간이 같다”(‘그 순간의 모든’)는 것을 깨닫는 순간 꽃은, 시인은 꽃 진 자리와 지켜지지 않는 약속과 바람 같은 나비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으리라.
◇나비야, 나야=오늘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16쪽/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