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섬과 귤과 바람의 시편들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2017.03.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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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이순호 시인 ‘낡은 상자 헌 못’

[시인의 집] 섬과 귤과 바람의 시편들


제주의 아이들은 바람과 같이 논다. 바람에 이끌려 다니기도 하고 바람과 장난도 친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바람과 싸우기도 한다. 싸울 때 바람의 뒤꽁무니를 밟아서 붙잡아 땅속에 넣어두기도 한다. 제주의 아이들은 바람의 아이들이다. 바람과 한 몸이다. 이런 봄날 이순호의 시를 읽고서야 제주의 유채와 보리와 많은 초목이 출렁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아이들 때문이다.

제주를 제재로 한 시들이 많이 보이는 시집이다. 시 ‘제주도 하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경험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맞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산과 들이 하늘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집을 짓고 대롱대롱 마을을 이루고/ 캄캄하게 빛나는 돌담을 껴안고”사는 것 같다. 사람들도 하늘에 발을 딛고 사는 모습이다. 부양법이다. 제주의 구름이 “귤을 따다가/ 아낙들이 후후 불어낸 입김”으로 생겨난 것이라니 발상이 새롭다.



시인은 제주 출신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1995년에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이다. 시인은 등단하여 허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허명으로 육지에서 제법 살다가 2011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서 돌집을 짓고 시를 쓰기도 하고 귤밭에서 몸을 굴리며 산다고 한다.

표제시 ‘낡은 상자 헌 못’은 시인이 낡은 귤 상자를 수리하다가 발상하여 쓴 시다.



한때 올망졸망 감귤 형제들 데리고 안 가본 곳 없는 나무 귤 상자, 이미 낡을 대로 낡아 가끔 밑이 홀라당 빠져 버린다. 저 늙은 주인을 닮아 삐걱삐걱, 더불어 한 몸이 됐을 법한 못들도 녹슬어 뚝뚝 부러지는 일이 많다. 기회에 번뜩이는 새 못 박아주면 좋으련만, 일부러 녹슨 못 구부러진 못 곧게 펴가며 조심조심 박는다. 새 못은 박는 족족 미끈미끈 쏙쏙 빠져버리고, 굵은 놈은 아예 송판을 작살내는 바람에 쓰고 싶어도 못쓴다. 이제는 송진내보다 귤 향이 짙어진 낡은 상자가 헌 못을 기꺼이 품는다.
-‘낡은 상자 헌 못‘ 전문

오래 사용하여 낡은 나무 귤 상자와 늙은 주인을 병치시키고 있다. 헌 귤 상자 실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보여주지만, 실은 귤 농사를 오래 짓고 산 늙은 주인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이다. 오래된 낡은 상자는 번뜩이는 새 못을 거부하고 헌 못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굶은 못은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거부한다. 헌 귤 상자는 자연에 세월에 순응하는 착한 사람을 닮았다.

귤 농사를 오래 짓다 보니 화자의 아버지는 몸에 귤 냄새가 배었다. 귤과 몸이 하나가 된 것이다. 시집의 첫 시 ‘못, 처럼’에서 화자는 오랫동안 “나무에 제대로 박혀/ 뿌리내린 못”처럼 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세상과 불화하였다는 것이다. 젊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도 머지않아 세상의 못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귤밭에서 오래 뒹굴다 보면 몸에서 귤 향기가 날 것이다.


◇낡은 상자 헌 못=이순호 지음. 글상걸상 펴냄. 60쪽/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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