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제재로 한 시들이 많이 보이는 시집이다. 시 ‘제주도 하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경험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맞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산과 들이 하늘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집을 짓고 대롱대롱 마을을 이루고/ 캄캄하게 빛나는 돌담을 껴안고”사는 것 같다. 사람들도 하늘에 발을 딛고 사는 모습이다. 부양법이다. 제주의 구름이 “귤을 따다가/ 아낙들이 후후 불어낸 입김”으로 생겨난 것이라니 발상이 새롭다.
표제시 ‘낡은 상자 헌 못’은 시인이 낡은 귤 상자를 수리하다가 발상하여 쓴 시다.
-‘낡은 상자 헌 못‘ 전문
오래 사용하여 낡은 나무 귤 상자와 늙은 주인을 병치시키고 있다. 헌 귤 상자 실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보여주지만, 실은 귤 농사를 오래 짓고 산 늙은 주인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이다. 오래된 낡은 상자는 번뜩이는 새 못을 거부하고 헌 못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굶은 못은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거부한다. 헌 귤 상자는 자연에 세월에 순응하는 착한 사람을 닮았다.
귤 농사를 오래 짓다 보니 화자의 아버지는 몸에 귤 냄새가 배었다. 귤과 몸이 하나가 된 것이다. 시집의 첫 시 ‘못, 처럼’에서 화자는 오랫동안 “나무에 제대로 박혀/ 뿌리내린 못”처럼 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세상과 불화하였다는 것이다. 젊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도 머지않아 세상의 못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귤밭에서 오래 뒹굴다 보면 몸에서 귤 향기가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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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상자 헌 못=이순호 지음. 글상걸상 펴냄. 60쪽/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