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했다…당신이라면?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17.03.2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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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부당한 지시 거부 못해 쇠고랑 찬 靑 참모들…부당한 지시 대응법 가르치는 美MBA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했다…당신이라면?


"이 기자도 나중에 정치 한번 해야지?" 정치부 기자를 하다보면 한번씩 이런 의례적인 덕담(?)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아유 그럴 깜냥도 안되고, 전혀 그런 생각도 없어요." 진심이다. 일단 그럴 능력이 안된다. 또 상경계 출신이라 그런지 정치 권력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무리 실속을 따져봐도 정치판에 뛰어들었을 때의 효용이 그에 따른 위험이나 비용에 못 미친다.

청와대 출입기자로 있으면서 이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엔 더욱 그랬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청와대 사람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 이밖에도 친하게 지내던 수많은 비서관, 행정관들이 잇따라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권력은 '손잡이 없는 양날의 칼'이라 잡는 순간 다친다는 흔해 빠진 레토릭이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지 몰랐다.



구속된 사람들의 경우 본인의 잘못이 전혀 없진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혐의는 윗선의 지시에서 비롯됐다. 그게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든,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었든, 아니면 최순실씨였든. 다들 똑똑한 사람인데 그게 부당한 지시라는 걸 몰랐을까? 알았다면 왜 그런 지시를 따랐을까?

청와대라는 특수 환경을 고려하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청와대에선 대통령이 법이다." 안 전 수석의 말이다. 좁은 집단에 갇혀 지내다 보면 생각이 획일화되고 왜곡되는 '집단사고'(Groupthink) 현상이 생긴다. 대통령이란 '절대권력'을 모시는 청와대에선 '절대복종'이 유일무이한 가치다. 김 전 실장의 지시도 비서관 입장에선 그게 대통령의 뜻인지 아닌지 구분할 길이 없었을 게다. 기밀자료를 보내라는 최씨의 요구를 받은 정 전 비서관의 눈앞엔 최씨의 '절친'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게 모든 걸 설명해주진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심리학에 '인지적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란 게 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이나 태도와 상충되는 현실적 상황에 처할 때 보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대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을 바꾸기 어려울 때 대신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길을 택한다. 상부에서 부당한 지시를 내릴 때도 적잖은 사람들이 '인지적 부조화'란 자기기만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러다 '공범'이 돼 쇠고랑을 차기도 한다.

상사의 부당한 요구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 주요 대학들의 MBA(경영학석사) 과정에선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할 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라는 등의 지시가 사례로 등장한다. 하버드대 MBA 과정에선 이런 경우 그냥 '사표'를 던지라고 한다. 언제 어디든 재취업할 수 있다는 하버드대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컬럼비아대 MBA 과정에선 끝까지 상관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안돼도 끝까지 맞서 싸우라고 한다. 물론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 자신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위에서 부당한 지시를 내리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한 노련한 관료에게 물었다. "일단 알겠다고 한 뒤 나중에 '알아보니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더라. 더 알아보겠다'고 둘러대면서 뭉개야죠"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다고 상사의 '레이저'와 인사상 불이익을 피할 수 있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사표를 내든, 끝까지 싸우든, 이리저리 둘러대며 버티든. 아니면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좋은 상사를 만나길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이래 저래 서글픈 월급쟁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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