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출입기자로 있으면서 이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엔 더욱 그랬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청와대 사람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 이밖에도 친하게 지내던 수많은 비서관, 행정관들이 잇따라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권력은 '손잡이 없는 양날의 칼'이라 잡는 순간 다친다는 흔해 빠진 레토릭이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지 몰랐다.
청와대라는 특수 환경을 고려하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청와대에선 대통령이 법이다." 안 전 수석의 말이다. 좁은 집단에 갇혀 지내다 보면 생각이 획일화되고 왜곡되는 '집단사고'(Groupthink) 현상이 생긴다. 대통령이란 '절대권력'을 모시는 청와대에선 '절대복종'이 유일무이한 가치다. 김 전 실장의 지시도 비서관 입장에선 그게 대통령의 뜻인지 아닌지 구분할 길이 없었을 게다. 기밀자료를 보내라는 최씨의 요구를 받은 정 전 비서관의 눈앞엔 최씨의 '절친'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을까?
상사의 부당한 요구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 주요 대학들의 MBA(경영학석사) 과정에선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할 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라는 등의 지시가 사례로 등장한다. 하버드대 MBA 과정에선 이런 경우 그냥 '사표'를 던지라고 한다. 언제 어디든 재취업할 수 있다는 하버드대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컬럼비아대 MBA 과정에선 끝까지 상관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안돼도 끝까지 맞서 싸우라고 한다. 물론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 자신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위에서 부당한 지시를 내리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한 노련한 관료에게 물었다. "일단 알겠다고 한 뒤 나중에 '알아보니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더라. 더 알아보겠다'고 둘러대면서 뭉개야죠"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다고 상사의 '레이저'와 인사상 불이익을 피할 수 있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사표를 내든, 끝까지 싸우든, 이리저리 둘러대며 버티든. 아니면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좋은 상사를 만나길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이래 저래 서글픈 월급쟁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