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L+]"CD로 내지말고 종이로 뽑아서 내라" 법원 서면주의 언제까지…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17.01.22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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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대법, 전자문서로 한 공소제기에 잇딴 파기환송.. "피고인 방어권보장" VS "IT환경 감안못한 입법공백"

대법원 청사대법원 청사


수십만건에서 수억건의 잘못한 사실내역을 일일이 종이로 인쇄해서 제출해야 한다?

IT기기를 이용한 범죄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에 대해 대법원이 잇따라 공소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놓으면서 공소제기 방식의 엄격한 서면주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최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정보통신망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원심에서 징역2년을 선고받은 A씨와 관련한 상고심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원심법원으로 환송했다.



A씨는 2014년 6월~2015년 6월까지 성명불상의 개인정보 판매업자로부터 개인정보를 구입하고 대출정보 수집업체와 정보교환 등을 통해 14억5000만여건에 달하는 타인의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 이름 등 개인정보를 모으고 이들 정보를 재판매했다는 등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1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A씨가 모은 정보의 건수를 약 4억2000만건으로 변경하는 등 공소장 변경허가신청을 구술형태로 제기했고 각 범죄 일람표를 CD(콤팩트디스크)로만 제출했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항소가 기각됐다. 하지만 상고심은 공소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형사소송법이 공소제기에 관해 엄격한 방식에 의한 서면주의를 취하는 것은 법원의 심판대상을 명확하게 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같은 방식에 따르지 않은 공소제기는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해 무효인 때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 "검사가 공소사실의 일부인 범죄일람표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열어보거나 출력할 수 있는 전자적 형태의 문서로 작성한 후 종이문서로 출력하지 않은 채 그 저장매체 자체를 서면인 공소장에 첨부해 제출한 경우에는 서면에 기재된 부분에 한해 적법하게 공소가 제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뿐"이라며 "이같은 형태의 공소제기를 허용하는 별도의 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저장매체나 전자적 형태의 문서를 공소장의 일부인 '서면'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1심으로서는 검사에게 공소사실 중 특정되지 않은 부분에 관한 특정을 요구하고 만약 검사가 특정하지 않으면 이 부분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어야 했다"며 "이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이 부분에 대해서도 모두 유죄로 인정한 것은 공소제기 방식과 공소사실 특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강조했다.

불법 프로그램을 설치해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조작 등을 하다가 기소된 B씨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B씨는 2014년 11월 전국 각지에 약 100대의 개인용 컴퓨터(PC)를 설치하고 여기에 원격제어 프로그램을 깔아 전국 각지에 400대에 달하는 조작용 PC를 마음대로 원격제어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B씨는 이 시스템을 통해 약 3만8000회에 걸쳐 28만여개에 달하는 키워드, 게시글의 검색순위를 조작, 포털사이트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1,2심을 거쳐 B씨는 징역 2년형의 집행유예에 추징금 8억원이 선고됐다. 하지만 대법원인 이 사건에서도 공소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검사가 제출한 공소장의 본문과 별지로 첨부된 범죄일람표에는 전체 연관검색어, 검색어 자동완성, 검색순위 상위노출 조작행위 중 일부에 대해서만 등록일시, 아이디, 대상 포털사, 대상 키워드 등이 기재돼 있을 뿐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 내용이 기재돼 있지 않은 데다 나머지 내용은 단지 CD에 저장돼 제출됐다는 이유에서다.

웹하드 프로그램을 통해 58만5000여건의 불법 콘텐츠를 유통시킨 혐의로 기소된 C씨 사건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CD형태로 자료를 제출한 공소방식이 위법하다며 C씨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린 원심에 대해 파기환송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이같은 대법원의 엄격한 판단이 얼마나 피고인의 방어권이나 인권보호에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IT기기 활용도가 높아진 요즘 CD에 저장된 전자문서가 방어권에 필요한 항목을 검색하는 데 더 빠를 수도 있고 종이로 인쇄했을 때 수만 페이지 이상의 종이가 소요되는 등 시간·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파기환송심에서 검찰이 다시 종이로 공소내용을 적시해 대응할 것이고 원심법원도 고인 피의자는 어차피 유죄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절차적 엄격함을 지키려는 시도가 확정판결 기일을 미루면서 되레 피고인들을 장기간에 걸쳐 괴롭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IT기기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도록 법규를 개정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윤상 변호사(법무법인 시헌)는 "엄격한 서면주의는 피고인에게 본인이 왜 기소됐는지, 뭘 방어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현실적으로 수만 페이지 문서출력 등이 문제가 된다면 CD 등 전자문서 형태로도 공소내용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고 피고인이 요청하면 이를 보여준다는 등 수준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상철 변호사(법률사무소 요수)도 "서면주의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등을 위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져왔지만 최근 IT관련 범죄들의 경우 공소사실이 방대한 경우가 많아 일일이 출력해 서면으로 공소를 제기하기에는 현실적인 불편함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저장매체를 통한 공소제기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입법적인 해결을 도입할 필요성을 고민해 볼 때가 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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