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블랙리스트가 '국정농단'의 핵심인 이유

머니투데이 박보희 기자 2017.01.09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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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작년에 준비하던 작품 있잖아. 대본 다 쓰고 캐스팅까지 끝났는데 갑자기 정부지원 취소돼서 돈도 못 받고 엎어졌던 거. 대신 듣도 보도 못한 업체가 들어와서 다들 황당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쪽에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사람이 있어서 그랬던 거래."

작가로 일하는 지인의 말이다. 공연기획자로 일하는 친구도 비슷한 말을 해줬다. 세월호 참사 이후 문화계 정부 지원 사업들이 유난히 이상하게 돌아갔단다. 처음 들어보는 업체들이 생소한 사업 명목으로 수억 원대 정부지원을 따내고, 약속했던 지원은 예산이 부족하다며 갑자기 끊기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는 것이다.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은 분분했지만, 그 '뭔가'가 무엇인지 현장에 있는 이들은 알지 못했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며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부에 비판적인 일명 '좌파'로 낙인찍힌 인사들 1만여명의 이름이 적인 명단이 있다는 것. 여기 이름을 올린 이는 어떤 정부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특별검사팀은 "블랙리스트의 공식 명칭은 '문화계 지원배제 명단'인데 존재하는 것은 맞다. 일부 명단을 확보해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 윗선으로 지목받는 곳이 청와대다.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누군가는 "블랙리스트는 어느 정부에나 있었다. 이게 왜 문제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신뢰다. 내 손으로 뽑지 않은 후보가 당선됐어도 그는 '우리'가 뽑은 지도자다. 내 편이 아닌 이가 정권을 잡아 내가 차별과 배제를 당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리면 투표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 된다.

블랙리스트는 '국정농단'의 핵심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을 가진 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는 배제 당했고, 마음에 드는 이들은 혜택을 누렸다.

블랙리스트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고위 공직자들이 연일 특검에 불려나오고 있다. 전 장관부터 청와대 비서관까지 국민이 준 권력과 세금을 손에 쥐고 휘두르던 이들이 조사를 앞두고는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인데, 나라를 위해 한 일인데 억울하다고 생각할까. 정부가, 대통령이 나서 나를 배제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들보다 더 억울할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기자수첩]블랙리스트가 '국정농단'의 핵심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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