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에서 제자의 학부모 부부를 우연히 만나 찍었다. 김성수 평론가는 맨 왼쪽. (김성수씨 제공) © News1
87년 벽두에 날아든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전방입소 투쟁부터 시작된 시위는 봄으로 가면서 더욱 뜨거워졌고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으로 정점에 달했다. 대학 2년째를 맞은 나는 이른 봄부터 입학 때 품었던 푸른 꿈들을 접어 넣고 화염병을 만들며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누가 알아준다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소수가 이렇게 희생한다고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과연 민주화가 된 내일을 살아볼 수나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6.10. 거리에 나온 수많은 시민들을 보면서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은 최루가스 때문에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신입생 사회과학 교육에 늘 도망다니던 뺀질이 신해철도 거리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외치는 구호는 조금씩 달랐어도 모두가 또 다른 나였고,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의 쓰디쓴 패배감을 맛보며 다시 한 번 광장에서의 에너지를 느껴볼 수 없을 것 같아 표표히 흩어졌던 우리들이었다.
87년이 좌절로 끝났었다면 2002년은 승리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더욱 큰 에너지를 형성할 수 있었고 그 에너지가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편에 나는 서 있었다. 혹자는 그것을 방향성 없는 에너지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국뽕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지만 그 에너지는 촛불집회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4년 만에 명예혁명의 전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광화문 역을 나서 거리를 걸으면서 난 87년과 2002년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확인했다. 나는 약속한 후배들보다 열 배는 많은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87년에 함께 거리에 있던 선후배들을 만났고, 2002년에 함께 환호성을 올리던 제자와 배우들을 만났다. 모두들 약속을 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거리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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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대한민국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야 우리 자식들이 세월호에 갇혀서 죽어가는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더 질서 정연하게 더욱 더 명예롭게 그래서 더욱 더 강력하게 하나의 물결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보라,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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