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고지식한 사람들의 힘

머니투데이 손동영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16.11.01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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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 시평]고지식한 사람들의 힘


1972년 6월 중순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한 호텔에 괴한이 침입한 흔적을 경비원이 발견해 신고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당시 호텔에는 야당의 전국위원회가 입주해 있었다. 경찰은 침입의 목적이 야당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교체하기 위함이라고 밝혔고 침입자의 수첩에서 닉슨 대통령 보좌관의 전화번호가 발견되면서 결국 연방수사국(FBI)이 수사에 나섰다. 대통령과 측근들은 중앙정보국(CIA)을 움직여 수사를 방해하고 증인을 매수하려 했다. 연말 선거에서 대통령이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사건은 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수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당시 특별검사가 핵심 증거제출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대통령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증거제출을 거부했고 법무장관에게 특별검사 해임을 명령했다. 장관은 명령에 불복해 사임했고 권한을 대행하게 된 법무부 차관도 대통령의 명령에 사임으로 맞섰다. 다음 권한대행이 특별검사를 해임했지만 새로 임명된 특별검사가 다시 증거제출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중요 부분이 삭제된 자료를 제출하면서 비서의 실수라고 둘러댔지만 결국 CIA를 통한 수사 방해를 시도했음이 드러냈다. 끝없이 악화되는 여론과 의회의 탄핵안 추진으로 마침내 대통령은 사임했다. 저 유명한 ‘워터게이트’는 이렇게 역사에 남았다.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을 상대로 새로 임명된 특별검사가 (국정을 걱정하여) 증거제출을 계속 요구하지 않았다면, 법무장관과 차관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FBI가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수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언론이 관심을 거두고 다른 이슈로 시선을 돌렸다면, 경찰이 침입자들의 의도를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 속 사람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살아있는 권력이 두렵지 않았거나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대한 걱정이 없었던 것일까?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우리 모두는 무대 위의 배우와 같다고 말한다. 직장이라는 무대에서는 사장 과장 대리 혹은 직원으로, 가정이라는 무대에서는 부모이거나 자녀, 형제자매로, 정겨운 술자리에서는 친구로. 우리의 삶은 다양한 역할놀이와 같고 무슨 역할을 맡느냐는 어떤 무대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무대에 어긋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일어난다. 예컨대 직장을 학교 동문회로 착각하면 동문 간의 의리(?)가 어느새 본래 역할을 압도하여 소수 의견을 내는 사람은 미움을 받거나 심하면 배신자로 몰린다. 역할보다 관계를 앞세우는 것이 더 유리하게 보일수록 그렇게 얽힌 집단은 패거리로 변질된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대학교수, 의사, 기업인과 같은 역할은 허공에 부유하는 이름표가 되고 만다.



2016년 가을. 역할을 망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회의 심장을 강타했다. 정치인이 장사를 했고, 기업인이 정치를 했으며 몇몇 민간인이 이 둘 모두를 했다. 대통령과의 ‘의리’가 공직자의 사명보다 (심지어 헌법보다)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럴수록 제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빛을 발한다. 집요하게 사실을 파헤치는 언론인, 판결 하나에 명예를 거는 법조인, 합리적 경영에 헌신하는 기업인, 진리탐구에 몰두하는 대학교수를 포함해 주어진 자리의 가치와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든 사람. 사적인 의리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다고 믿는 이런 사람들은 흔히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비웃음을 사곤 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인 힘은 거대한 진실을 수면 위로 밀어올릴 만큼 강하다. 지금 주변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이 살아온 사람들을 돌아보고 작은 경의를 표하자.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우리 모두를 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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