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에 왜 순우리말을 써?" 쉽게 쓰면 안되나요

머니투데이 이미영 기자 2016.10.09 11:42
글자크기

1930년대 김두봉 선생, '일식→해가림' 등 우리말 지키기 애써…
여전한 전문지식의 폐쇄성, '한자어' 우대하는 사회적 인식 탓

주시경 선생/사진=나무위키주시경 선생/사진=나무위키


'빛몸', '해가림', '달가림'

1932년에 편찬된 '한글' 1권 4호에 나온 단어들이다. 대체 무슨 뜻일까?

이 단어들은 근대 지식인 김두봉 선생이 우리말로 바꾼 과학 용어들이다. 빛몸은 '광체', 해가림은 '일식', 달가림은 '월식'을 뜻한다. 과학적 현상을 우리나라 말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김 선생은 '한글'에 물리학 술어 384개, 수학 술어 108개, 화학 술어 39개 등을 만들어 올렸다.



김 선생과 함께 뜻을 했던 그의 스승 주시경, 그리고 동료 최현배는 우리나라 말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이들이 활동했던 1910년대에도 '한글 파괴'는 꽤나 골치 아팠던 모양이다.

주시경 선생은 1908년 '조선어 문전음학' 머리글에서 '제 나라 말과 글을 이 지경에 두고 도외시하면 국성도 날로 쇠퇴할 것이요, 국성이 날로 쇠퇴하면 나라의 힘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우리나라 말을 조사해 바로 잡아 장려하는 것이 급하다'고 적었다.



그는 1911년 자신이 수집한 단어들의 뜻풀이를 모아 한 책으로 모았다. 책 이름은 '말 모이'로 지었다. 말 그대로 '말을 모은 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온갖 사물과 지식을 어휘 단위로 모아 풀이한 책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전'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많은 학술용어들은 한글보다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한자어의 독음으로 널리 쓰이게 됐다. 1999년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에는 51개의 학술분야의 단어 뜻이 풀이됐다. 사전에 나온 50만개의 단어 중 19만개가 학술용어였다.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학술용어의 지나친 한자 사용이 오히려 전문학술분야의 장벽을 더 높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수한 지식이나 용어도 잘 이해되기 위해선 어렵지 않고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학술용어 대부분은 외래어와 한자어가 난무해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 연구조사결과에 따르면 전문언어와 일상용어의 괴리가 미국이나 일본은 각각 40%와 60%인 반면 우리나라는 80%에 이른다.

우리생활에서 '한자어 장애'는 일상적이다. 예를 들어, '제대혈'이라는 단어로 '탯줄피, 탯줄혈액'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헌법을 비롯한 법률에 쓰인 한자어도 사람들을 괴롭힌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교에서 고시공부를 3년간 했던 김모(28)양은 "고시공부 과목에서 헌법과 행정법 등은 필수인데 이 법전에 나와있는 한자어를 몰라 한자어만 공부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며 "한자어를 익혔지만 그 뜻을 몰라서 헤매는 수험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한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교양이 없거나 무식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인식도 바뀔 때가 됐다는 지적도 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최근 대기업에 입사한 박 모씨(30)는 "정규 수업시간에 한자교육이 없어서 모르는 것뿐인데 보고서에 한자로 된 전문용어 대신 한글화 된 문서를 썼다며 지적받은 적이 종종있다"며 "한자로 쓰면 좀 더 전문성이 있어 보이고, 한자를 모르면 교양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어려운 말을 쓰는 경우도 생겼다"고 말했다.

조재수 겨레말큰사전 상임이사는 한 학술지에 "우리말로 학물을 하기 위해서는 학문용어에 되도록 우리말을 쓰고 외래용어는 우리말로 다듬고 지어쓰는 일에 뜻을 모아야 한다"며 "국어교육을 한자교육이라고 생각하거나 논설이나 논문에 한자어를 많이 써야 좋은 점수를 주는 교수들이 있는데 이같은 언어 인식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