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안잡아요"…'김영란법 시대'가 바꿔놓은 관가

머니투데이 세종=정현수 기자, 조성훈 기자 2016.09.2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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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시행]가액기준과 무관하게 몸사리기…정부 소속 민간위원회 위원들도 사퇴 고려 움직임

9월 9일 정부세종청사 농식품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쌀수급 안정 및 청탁금지법 관련 지방자치단체 부지사 및 부시장 회의장에 29000원짜리 김영란 식사세트가 전시돼 있다 /사진=뉴스1<br>
9월 9일 정부세종청사 농식품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쌀수급 안정 및 청탁금지법 관련 지방자치단체 부지사 및 부시장 회의장에 29000원짜리 김영란 식사세트가 전시돼 있다 /사진=뉴스1


최근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본인보다는 정부세종청사 인근에 신축되고 있는 상가 건물을 걱정하고 있다. 국무조정실 맞은편에 위치한 이 곳은 정부세종청사 조성 초기 인기가 많았던 상가 부지다.

이같은 오지랖의 배경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김영란법) 시행과 맞물린다. 김영란법으로 인해 세종시 전체적으로 음식점 매출은 감소할 것으로 관측된다.



여기에는 공무원들 스스로 식사 약속을 줄일 것이라는 암묵적인 판단이 작용한다. 세종시에 위치한 경제부처의 A과장은 “김영란법 가액 기준을 떠나 당분간 식사 약속을 최소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세종시 관가를 관통하는 전반적인 분위기다.

세종시는 김영란법이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지역이다. 정부세종청사와 함께 새롭게 조성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인구는 13만8000명이다. 18개 중앙부처 소속 공무원 1만2000여명과 국책연구단지 종사자 4000여명, 세종시청 공무원 1200여명 중 상당수가 현재 세종시에 살고 있다.



공무원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세종시 식당들은 울상이다. 올해 6월 기준 세종시의 음식점은 전년대비 88% 늘어난 799개다. 세종시가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면서 편의시설이 늘어난 것인데,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경쟁에서 도태된 세종시 음식점들이 폐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런데다 김영란법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가왔다. 일단 세종시 식당들은 속속 3만원 미만의 이른바 ‘김영란 메뉴’를 내놓고 있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종업원수도 줄이고 있다.

세종시의 위치한 한 일식집 사장은 “주요 고객층인 공무원들의 보수적 성향을 감안할 때 식사 자체를 꺼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이 현재 가장 피하고자 하는 것은 ‘시범 케이스’다. 김영란법 시행 초기 엄격한 기준을 적용받아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우려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간인과의 약속 뿐 아니라 직원회식까지 줄이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른바 ‘란파라치’도 속속 세종시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실관계가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세종시 인근 원룸의 수요가 늘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이들 대부분은 김영란법 위반 사례를 적발하려는 란파라치 수요로 추정된다.

국세청 산하 일부 세무서가 사무실 출입문에 부착된 직원들의 직책과 이름, 사진을 떼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란파라치들의 악용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국세청 관계자는 “본청 차원에서 지시한 바는 없다”고 설명했다.

공무원만 김영란법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세종시에 위치한 국책연구단지 직원들은 공무원과 같은 기준에서 김영란법을 적용 받는다. 특정 분야의 권위자급 연구원들이 각종 세미나 참석 비용을 스스로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생기고 있다.

정부부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민간위원들은 더 난감하다. 이들은 공무수행 사인(私人)으로 분류된다. 민간인이지만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정부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때 받았던 교통비조차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권익위원회는 이에 대한 명확한 유권해석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간위원들은 굳이 정부부처 위원회에 남아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견이 많다. 현재 법률과 대통령에 근거한 행정기관 위원회는 총 554개다.

정부부처 민관위원회에 참석하는 한 민간전문가는 “정부의 요청으로 참여했는데 굳이 법의 규제를 받거나 오해를 사면서 까지 활동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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