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부동의 진리에서 벗어난 ‘사회적 해석’이 진짜 과학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6.09.2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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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을 읽읍시다] <14>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인간 대 비인간 다루는 과학을 ‘네트워크’로 이해

‘1+1=2’? 부동의 진리에서 벗어난 ‘사회적 해석’이 진짜 과학


고대와 중세 사람들은 무거운 물체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려는 경향 때문에 사과가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뉴턴 이후에는 지구의 중력이 사과를 잡아당기기 때문에, 일반 상대성 이론 이후로는 지구 주변의 공간이 휘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휜 공간을 따라 운동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앞으로 100년 뒤에는 또 다른 해석이 나올지 모른다.

서양이 보는 고래는 멸종 위기와 높은 지능의 이유로 포획이 야만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 포경 반대 운동은 환경 제국주의적 동맹일 뿐이다. 일본의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고래는 금붕어와 같은 물고기일 뿐이며 아직 멸종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서양과 일본의 ‘관점’은 다르지만, 논리는 모두 ‘과학적’이다. 그러면 고래는 보호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포획의 대상인가.



확고부동한 ‘과학적 사실’들 앞에서 흔들리는 해석은 모두 ‘패러다임’의 차이에서 생긴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창한 이 개념은 같은 사실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현상을 설명한다.

과학을 반드시 존재하는 ‘정답의 영역’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변화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 홍성욱(과학기술학자) 교수는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네트워크’로 확장해 해석한다. 네트워크는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뻗어 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성장하던 네트워크가 소멸하거나 대체되기도 하고 여러 네트워크가 하나로 응축되기도 한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듯, 과학 역시 인간 대 비인간, 자연과 사회의 끊임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서양에서 과학의 발전은 숱한 논쟁과 함께 이어졌다. 가령 뉴턴이 역학이론을 발표하면 라이프니츠는 과학적 근거로, 데이비드 흄은 철학적 반론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괴테 같은 문인도 이 대열에 합류에 뉴턴을 비판했다. 과학은 서양에서 사회와 문화 속에 조밀하게 뿌리내린 결과의 양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논쟁이 모두 끝난 뒤 교과서에 실린 뉴턴 과학을 단순하게 수용하고 배웠다. 교과서 과학은 깔끔하고 어떤 논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과정의 과학이 아닌, 결과의 과학이었기 때문. 과학에 대한 무의식적 경배의식과 절대적 찬양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1+1=2’라는 객관적 사실이 영구적 진리로 수용되기 이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은 천원 짜리 두 장이 아닌 천원과 만원의 결합이 지닌 또 다른 네트워크의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지고 볶는 과정이 ‘사회문화적’ 과정이며, 과학을 경제 성장의 토대로만 여기지 않고 사회적 활동으로 인식하는 과제가 과학기술학의 근본이다. 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 ‘과학을 완성된 진리만을 발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충고한다. “과학의 개념이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이 내놓는 과학의 결과를 그냥 가지고 오면 된다.”

과학기술은 비인간을 다룬다. ‘실험’은 자동차, 항생제, 줄기세포 등 비인간적 요소를 길들이는 인간의 행위다. 과학자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연결망을 만드는 역할을 실험실에서 하는 존재들인데, 과학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1+1=2’라는 초월적 가정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과학이 말하는 자연의 법칙은 인간을 초월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모델’일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은 자신이 만들고 가공한 비인간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일종의 책임을 져야 한다”며 “때론 실제 사회에 적용돼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과학기술의 온전한 발전과 가치를 위해서라도 사회와의 끊임없는 소통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홍성욱 지음. 동아시아 펴냄. 448쪽/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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