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전 오늘… 사회복지사로 활동한 퍼스트레이디의 비극적 죽음

머니투데이 진경진 기자 2016.08.15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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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오늘]육영수 여사,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탄 맞고 운명

고 육영수 여사 생전 모습. /사진=뉴스1고 육영수 여사 생전 모습. /사진=뉴스1


42년 전 오늘… 사회복지사로 활동한 퍼스트레이디의 비극적 죽음
"엄마(육영수 여사)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대", "아이고, 엄마 모습이다."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얼마 남지 않은 선거 지원차 부산을 찾았다. 시장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박 위원장을 본 적지 않은 이들이 '육영수 여사'가 떠오른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일부는 실제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육영수 여사에 대해선 크게 이견이 없는 편이다. 퍼스트레이디이자 사회복지사로서 그의 활약은 최정상부터 최말단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충북 옥천에서 지방 부호의 차녀로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박정희 당시 육군 소령과 만나 결혼한 그는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1963년 박 전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육영수 여사의 청와대 생활도 시작됐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그림자처럼 대통령을 내조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라고 거론할 정도로 '청와대의 야당'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시라"는 말보다 "해선 안된다"는 말이 더 많았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민심을 살피기 위해 직접 수많은 현장을 찾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민원을 챙겼다. 편지로 억울한 일을 적어 보내면 직접 읽어보고 민원을 해결해주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청와대에 학자들을 초청해 국사, 고고학, 철학, 사회학, 정치외교사 등을 공부하며 식견을 넓혔다. 어느 날은 경희대학교에서 주부들을 위한 교양강좌를 진행했는데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듣고 난 후 다른 주부들과 같이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나환자 돕기, 난민구호, 지적장애인 교육, 헌혈 운동, 적십자 봉사활동, 불우아동·고아구호사업 등 각종 사회 봉사활동 현장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장·차관 등 사회지도층 부인들이 참여하는 양지회를 설립해 매년 사랑의 열매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도 이어갔다.

'어깨동무'라는 어린이 잡지를 창간해 농어촌 어린이에게 나눠준 활동도 유명하다. 특히 '부강한 국가는 여성의 힘에서 나온다'라는 신념으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국민들은 퍼스트레이디의 씩씩한 겉모습 뒤에 평범하고 소박한 씀씀이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20분 서울 국립극장에서 진행되던 제29회 광복절 경축 기념식에서 총성이 울렸다.

좌석 앞 줄에 자리잡고있던 한 남성이 일어나 경축사를 낭독중이던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저격한 것이다. 이후 경호원과 저격범 문세광 사이에서 총성이 몇차례 더 울렸고 박 전 대통령은 가까스로 총알을 피했다.

쓰러진 사람은 육영수 여사였다. 박 전 대통령의 연설 내내 흔들림없이 자태를 유지하던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상을 입은 것이다. 그는 곧장 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5시간4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저격범이 체포된 후 태연하게 경축사 낭독을 이어갔고 광복절 기념식은 예정대로 끝났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이 식장을 퇴장할 때까지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날 오후 7시 육영수 여사는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큰 영애(박근혜 대통령)는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4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육영수 여사에게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선 의혹이 남아있다. 이날 사건 현장에서 숨진 사람은 육영수 여사만이 아니었다. 합창 단원 자격으로 국립극장에 있던 여고생 장봉화양 역시 경호원이 잘못 쏜 총알에 맞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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