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바람' 기자촌에 대한 추억

머니투데이 신혜선 문화부장 2016.06.05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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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뉴타운 개발에 사라진 '기자촌' 이야기…'산동네 사람'도 함께 살았던 그곳

1969년 3월 29일 기자촌 준공식 29일 오전 2시30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에서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홍종철 문공부장관, 김현옥 서울시장,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 내빈과 회원 2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기자촌 건립기공식(조선일보 1969년 3월 30일자)/사진제공=은평구청1969년 3월 29일 기자촌 준공식 29일 오전 2시30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에서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홍종철 문공부장관, 김현옥 서울시장,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등 내빈과 회원 2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기자촌 건립기공식(조선일보 1969년 3월 30일자)/사진제공=은평구청


아버지의 고향을 따르는 본적과 결혼 후 ‘호적’을 파는 제도를 모른 척하면 나의 고향은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기자촌’이다. 대학 진학 후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기자촌이라고 답하면 ‘기지촌?’이라고 되묻는 애들이 더 많았다. 기자촌은 이름 그대로 기자들이 살게 되면서 형성되고 이름이 붙여진 마을이다.

“글쎄, 동네가 완공될 즈음에 갔지.” 엄마의 기억을 더듬으니 나는 서너 살부터 기자촌에서 자랐다. 초등학교까지 졸업한,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어서인지 태어난 곳은 아니어도 내 고향은 늘 ‘기자촌’이었다.



기자촌은 서울이지만 시골과 다름없었다. 집마다 축대가 있고, 그 축대 뒷문을 열면 가지런히 심은 호박, 그 호박에 할머니의 요강을 들고 오줌 거름을 주는 게 아침 시작이었다. 북한산 줄기 벌거숭이 ‘바위산’에 끼리끼리 동굴 아지트를 만들었고, 지치도록 놀다가 내려오는 길에 산딸기며 아카시아 꽃을 따먹고 약수로 목을 축였다. 겨울엔 얼어붙은 논바닥이 스케이트장이었다. 눈이 많이 온 날에는 경사진 골목에서 쌀포대를 깔고 미끄럼을 타는 개구쟁이들과 연탄재를 부수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엄마들과 싸움이 계속됐다.

시골스런 기자촌이지만 ‘치맛바람’은 세게 불었다. 강남 8학군에 분 치맛바람이 강을 건너와 유행처럼 번졌다. 둘째인 덕에 그 바람을 다소 피할 수 있었지만, 엄마와 언니는 심각했다.



“말도 마라. 젊은 엄마들이 우르르 몰려다녔어. 대단했지. 처음엔 뭣도 모르고 끼었다가 돈도 없고 슬쩍 빠졌지. 학교에 그 잘난 봉투 한번 안 가져간 건 우리 집하고 선생네 사모들뿐이었을 거다. 먹고살 만한 집들, 좀 배웠다 싶은 집은 죄다 학교에 가기 바빴는데….” “국어책을 읽는데 갑자기 앉으라고 하더라고. 그리고는 아무개가 읽어봐라. 복도 창문으로 그 애 엄마가 보이더라.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는 날이면 선생의 애들 대접은 180도 달라졌어. 엄마 기억나? 선생님이 엄마 한번 학교에 오라고 하는데 끝내 엄마 안 간 거.”

엄마도 가고 싶었을 거다. 자식 일인데. 그런데 형편이 안됐다. 세 살 터울인 언니는 자주 울었다. 그렇지 않은 선생도 있었지만, 봉투를 좋아해 ‘받은 만큼 아이들을 차별하던’ 선생이 적지 않았다. 17반까지, 4학년부터 오전반 오후반을 할 정도 넘쳐난 아이들. 공부를 잘해도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으나 상처 입은 아이들이 꽤 많았다.

기자촌의 초기 분양 세대는 420여 가구라고 한다. 기자촌이지만 엄밀히 말해 취재기자만 살았던 건 아니다. 편집, 교열, 조판, 독자관리, 광고. “신문사에 취재기자만 있더냐.” 여든을 바라보시는 엄마의 증언이 새삼스럽게 씁쓸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름 아닌 아이들이 만든 보이지 않는 서열을 나도 눈치채서다.


엄마의 치맛바람 능력이 이미 검증했지만, 천하에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버지의 서열에 따라 자라는 내내 기가 죽어있었던 친구들이 꽤 여럿 있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터놓고 지내면서 “아무개네야, 누구 엄마야,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동네에서 어떤 엄마가 다른 엄마에게 ‘사모님’이라고 부른다면.

더군다나 그곳에는 언론을 관리하는 부처 공무원들도 살았다. 아이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높은 아빠’와 ‘낮은 아빠’를 잘도 구분하고 의기양양하거나 풀이 죽었다. 나처럼 아예 그 서열에 낄 수 없는 ‘가난한 민간인’ 자식들은 차라리 ‘자유로웠다’. 어른들은 알았을까, 아이들 간에 생긴 서열을.

옛 기자촌 전경./사진제공=은평구청옛 기자촌 전경./사진제공=은평구청
뉴타운에 입주한 지인 집을 방문하느라 간 적 있다. 동행한 친구가 살던 곳에 가보겠나며 물었지만 됐다고 했다. 골목도 축대도 사라진 곳에서 고향을 찾기 어려움을 알아서다.

기자촌을 새삼 떠올린 건 은평구의 친절한 보도자료 덕이다. 올해가, 명패만 남은 기자촌 계획수립 50년이란다. 해서 지난 2일 기자촌에 살았던 원로 언론인을 중심으로 ‘기자촌 홈커밍데이’ 행사를 개최하고, 기자촌을 미래통일시대를 대비한 문학테마파크로 조성하겠다는 뜻을 모은다는 자료가 나왔다. 언론인 출신 문인도 다수라 ‘한국문학관’ 유치 의지가 큰 듯하다.

“엄마, 아무개 언니, 아무개 오빠네 아빠가 다 기자였어?” “아무개네 아빠는 국장까지 했지. 아무개네는 취재기자가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그 국장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떴지. 그 양반이 갔으니 많이들 가시지 않았나 싶다. 근데 새삼스럽게 왜 묻냐?”

개인적으론 같은 골목 모퉁이에 산 S 앵커 ‘언니’를 기억한다. 공영방송 최초로 9시 뉴스 간판 앵커를 맡아서 동네잔치가 벌어졌던가. 동네 여자아이들은 “너희는 커서 그 언니만큼만 되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대부분은 그녀를 정치인의 아내로 기억할 것이다.

다시 기자촌 생활을 돌이키니 소소한 일상이 기억난다. 식구처럼 키우던 개를 뒷산서 매타작해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 아이들을 울렸던 아버지들, 치맛바람 날리며 아이들 교육열에 앞장서고, 목동 신시가지에 세워지는 아파트 입주를 꿈꾸며 기자촌을 떠나고 싶어 했던 엄마들. 대통령이 죽었을 때 골목이며, 대문 앞이며 어두운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고, 빈번한 술자리를 가졌지만 한숨만 쉬었던 부모들.

기자촌에는 언론사 사람들만 산 건 아니다. 아이들 때문인지 특히 교사도 많았고, 우리 부모처럼 ‘어쩌다 기자촌에 흘러들어 간’ 도시빈민, 실패한 사업가, '재야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기자촌 가장 높은 곳에 ‘산동네’ 사람들이 살았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언론인 집단 마을, 잊힌 기자촌을 다시 살리기 위한 마음으로 추진됐다’는 보도자료를 읽으며 문득 ‘기자촌에 기자 정신이 흘렀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 기자'들이 다수라 해서 그 기자 정신이 마을에 흐르며 드러나게 배울 것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린벨트가 풀려야 집값이 오를 텐데…. 왜 하필 여기로 선택했느냐"는 푸념의 목소리가 귀에 더 쟁쟁하다.

무엇보다 사라진 마을에선 과거 이야기가 전해질 수 없다. '뉴 타운'을 만드느라 담장과 마당을 허물고 산을 깎았는데 전직 기자들이 모인다고 뭐가 될까. 기자촌은 이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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