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현실은 미국의 의사 아툴 가완디가 지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책을 보면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조차 다수가 자신의 마지막을 인정하지 못해 죽음에 대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죽음은 생각한 적이 없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금 더 사는데 주력하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정말 쓰고 싶은 곳에 쓰지 못한 채 수술과 호흡기와 영양소를 공급하는 관에 의지한 채 세상과 작별을 고하게 된다.
카스텐슨은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따라 인생을 보내고 싶어하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이 경험하고 배우는데 주력한다. 가족과 함께 있기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세상이 칭송하는 것을 이루고 달성하고 정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거나 건강이 나빠져 삶의 시야가 축소되고 마지막이 머지않았음을 실감하면 삶의 초점이 지금 이 순간, 이 곳으로 옮겨오게 된다.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을 때는 세상이 좋다고 추앙하는 것을 찾아 밖으로 나돌지만 인생에 마지막이 있음을 알게 되면 결국은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수많은 현자들이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한결같은 가르침을 주는 이유도 여기 있다.
지금도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는데 앞으로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일자리가 더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 변화를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는 한숨 소리도 들린다. 기술의 발달이 부의 격차를 심화시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실현하기 힘든 꿈이 됐다는 불평도 불거진다. 이 모든 암울한 환경 속에서 고요하게 상상해보자. 나의 장례식은 어떨 것인가. 그 마지막을 떠올릴 수 있어야만 우리는 수많은 소음이 뒤섞인 현실 속에서 진정한 오늘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