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샤프의 '가에루'와 삼성의 '문화 혁신'

머니투데이 김준형 부국장 2016.04.0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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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숨겨줬던 휴머니스트 하야카와 도쿠지, 그가 창조한 샤프는 왜 망했을까

편집자주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40雜s]샤프의 '가에루'와 삼성의 '문화 혁신'


밥 먹다가 남들이 눈치 못 채게 원터치로 허리띠를 풀고, 하루하루 늘어가는 뱃살도 벨트 구멍 걱정 없이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자동 벨트 버클이다. 자동벨트를 필수품으로 삼는 나같은 '아재'들은 그래서 하야카와 도쿠지(사진)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야카와는 자동버클의 원조 '도쿠비조(德尾錠:비조는 버클의 일본식 표기)뿐 아니라 아이들 공부할 때 쓰는 샤프펜슬, 주머니에 꽂고 다닐 수 있는 펜 뚜껑을 발명하고 라디오 TV 대중화를 이끌었다. 세계 최초의 집적회로(IC) 계산기, 세계 첫 액정화면(LCD패널)을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가이자 기업인인 그가 창조한 샤프의 주인이 얼마전 대만의 홍하이그룹으로 바뀌었다.



도쿠지가 창조한 샤프가 막판 가격 후려치기의 수모까지 당하며 팔려나가는 걸 보고 착잡한 마음까지 들어 10년 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전기 '샤프를 창조한 사나이(굿모닝북스, 2006년)'를 주문해 다시 읽었다.

◇ 조선인 직원 끝까지 숨겨줬던 휴머니스트



발명가 기업인이기에 앞서 그를 위대하게 만든 건 그의 삶 자체이다. 한때 대한민국 독자들의 눈물까지 쏙 빼게 만들었던 일본 실화소설 '오싱' 못지 않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2살 때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내진 그는 열 살도 차이가 나지 않는 새엄마에게 학대당하며 자랐다. 발로 차 변소에 빠뜨려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새엄마였지만 그는 견습직공으로 일해 번 돈을 꼬박꼬박 갖다 바쳤다.

타고난 손재주와 노력으로 '장인'으로 성장해 자신 소유의 '하야카와 전기(電機)'를 설립할 정도로 자수성가했지만, 시련은 그를 지독하게 시험했다. 1923년 간도(관동) 대지진 당시 그의 두 아들은 아내의 눈 앞에서 '불타는 강물'에 떠내려 갔다(그 충격과 화상으로 29살 나이에 몇년뒤 그 아내도 삶을 마감한다).

흥분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광기의 복수를 저질렀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그는 한국인 직원을 숨겨주고 자전거로 피신시킨다.


관동 대지진 이후에도 샤프 펜슬 독점생산권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가 헐값에 생산권을 빼앗기고 돈까지 이중으로 갚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어려울 때마다 도움의 손길로 돌아와 재기의 바탕이 됐다. 실패할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끝없는 탐구심, 그리고 기술과 사람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애정이었다.

◇ '선수(先手)필승'의 퍼스트 무버

하야카와이즘의 요체는 '선수필승', 즉 "먼저 만들면 이긴다"였다. 요샛말로 치면 '퍼스트 무버(First Mover)'다.
반면 여러 모로 하야카와와 비교되는 인물이 마쓰시다 고노스케다. 견습 점원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말년까지 친구로 교우했다. 도쿠지 빈소에 가장 먼저 달려온 것도 고노스케일 정도로 깊은 우정을 나눴지만 기업으로서는 대조적인 경쟁상대였다.
마쓰시다 전기는 '마네시다(흉내내는 마쓰시다)'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을 가졌다. 고노스케는 "생필품을 수돗물처럼 싸게 대량으로 공급해서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게 기업의 사명"이라는 '수도이론'을 신조로 삼았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인 셈이다.

예를 들어, 샤프가 라디오 '샤프다인'을 생산, 일본에 라디오시대를 연 게 1926년이었다. 마쓰시다는 4년 뒤인 1930년 다른 업체와 기술 제휴를 통해 라디오를 만들기 시작해 결국 시장을 장악했다.

하야카와전기의 별명은 '하야맛다(서두르는 하야카와)'였다. 너무 빨리 앞서 나가서 손해를 본다는 의미다. 마쓰시다처럼 약삭빠르게 기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도쿠지는 "다른 회사가 흉내내려는 제품을 개발해나가자. 이런 모방이 경쟁을 낳고 기술을 향상시켜 경제발전으로 이어진다"고 되받아쳤다. 그는 평생 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 '다섯 가지 축적'...최우선은 인재

그는 신용, 자본, 봉사, 인재, 거래선이 자산이라고 보는 '다섯 가지의 축적'을 기업의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애정을 갖고 인재를 기른다"는 도쿠지의 신념이었다.
그는 1954년 벌써 직원들과 인근 주민들을 위한 보육원을 만들었다. 장애인 종업원들로만 구성된 '특선공장'을 만들고 장애자단체의 장을 맡아 다른 기업인들이라면 '규제'로 여겼을 장애자 고용촉진법 청원에 앞장섰다.

1935년 회사를 개인기업에서 법인화하면서 그는 밀렸던 상여금의 5배를 주식으로 줬고, 공로사원 8명에게는 별도로 회사 자본금(30만엔)의 3분의1에 가까운 9만엔을 증여했다.
1945년 미군정이 노동조합법을 공포, 노조결성이 유행이 됐다. 하야카와전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조를 만들겠다며 그를 찾아온 사원들에게 그는 "좋아, 열심히 해봐"라며 시원스럽게 찬성해줬다.(훗날 미군정의 긴축정책으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노조는 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자진해서 인원감축안을 만들어 제출한다)
상장 3년 뒤엔 1952년, 한국전쟁 덕에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하야카와는 자기 소유 주식을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 "다음엔 태양열"

1970년 하야카와 도쿠지는 77세에 회장으로 물러났다. 당시 53세이던 사에키 아키라 전무가 사장을 맡아 전문경영인 체제가 이어졌다.
그해 회사 이름도 샤프로 바꿨다. 사에키 신임 사장의 제안이었다. 창업자의 이름을 버리고 제품명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자고 말할 수 있었던 후임자,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인 경영자의 합작 개명이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두 아들을 잃은 도쿠지는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고 혼외자 딸 하나가 있었다. 손녀같은 딸을 너무도 사랑한 그는 샤프 직원을 데릴사위로 삼았지만, 회사를 물려주지 않았다.
샤프가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해가던 1980년 하야카와는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다음엔 태양열의 시대"라며 '선수필승'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창업자의 시대가 간 뒤에도 샤프의 전성기는 20년을 이어졌다.

그랬던 샤프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결국 팔려가는 신세가 된 데는 여러가지 해석이 뒤따른다.

"삼성 LG같은 글로벌 시장의 '패스트 팔로어'들이 발빠르게 시장을 확대하는 동안 기존 시장에 안주했다"
"퍼스트 무버'로서 신기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시장 확대에 실패했다"
"오너가 없다 보니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부의 보조금 의존도가 높은 내수시장에 의존하다가 보조금 중단과 더불어 치명타를 입게 됐다"

모두가 일리있는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을 빌리자면, 망한 집안은 이유가 수백가지 아닌가.
하지만 이 같은 수많은 이유를 묶어내는 공통 분모는 ‘소통’이었다.

◇ 너무 늦었던 '카에루'...그리고, 삼성의 '문화 대혁신'

매각 운명에 처하기 몇년 전, 샤프는 기업 풍토 개혁 운동인 ‘가에루 (かえる:돌아가기) 운동’ 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장이건 평직원이건 직위가 아닌 ‘~ 상(~씨 )’ 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었다. 경영진의 결정에 반대하지 못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분위기가 샤프를 위기로 몰고 간 수많은 이유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반성이다. 당시 산케이신문은 “2~4대 사장이 모두 인척 관계로 엮여 ‘톱다운 경영’이 고착됐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면 좌천되는 ‘이상한 기업문화’가 자리잡았다(2013.12.4)"고 지적했다.

샤프의 가에루 개혁은 '주주 고객 종업원을 비롯한 모든 이해 당사자와 상호 번영을 기한다'는 창업자 하야카와 도쿠지씨의 경영철학으로 돌아가자는 '백 투더 베이직(Back to the Basic) 운동이었다. 다카하시 사장은 가에루를 제창하며 전국 각지의 계열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미 배는 복원력을 상실하고 기울어진 뒤였다.
홍하이와 함께 샤프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INCJ가 다카하시 고조 사장 등 3명의 임원 퇴진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도 불통의 기업문화가 샤프의 ‘암’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때 샤프의 유력한 인수후보로 거론되기도 한 삼성이 요즘 80년된 기업문화를 바꾸는 ‘문화대혁신’에 나서고 있다. ‘관리의 삼성’으로 대변되는 수직적 문화를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문화로 바꾸자는 것이다. ’~장(長)‘으로 대변되는 권위적인 직함 대신 수평적 호칭을 도입하자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선두에 서 있다.

샤프의 ’가에루‘는 너무 늦은 것이었지만, 삼성의 ’문화대혁신‘은 다행히 아주 늦은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주 일러 보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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