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정원 무서워 하는 사람이 없다던데"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16.02.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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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국정원의 '권한 남용' 차단, 대통령 의지에 달려

"요즘 국정원 무서워 하는 사람이 없다던데"


1998년 8월 청와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이종찬 부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당시 현안이던 농·축·수협 개혁 문제를 보고했다. 이 부장은 단위조합 통폐합에 반대하는 강성 조합장들에 대한 내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를 받던 김 대통령이 눈을 감더니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이 부장, 애초부터 우리가 이런 일 하지 말자고 안기부를 개혁한 것 아닙니까?" 여전히 '국내정치 개입'이란 구습을 버리지 못한 안기부에 대한 질책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 부장은 황급히 보고서를 챙겨 대통령 집무실을 나왔다.



이듬해 4월, 국가정보원장으로 직함이 바뀐 이 원장이 김 대통령에게 '총풍 사건'의 처리 동향을 보고했다. 1997년 대선 직전 청와대 행정관 등 3명이 '안보정국' 조성을 위해 북측에 휴전선 일대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김 대통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언제 일어난 사건인데, 아직 1심 재판도 안 끝나고 이렇게 질질 끌고 가는 거요?" 그리곤 덧붙였다. "요즘 국정원 무서워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총풍 사건의 조기 종결을 위한 국정원의 역할을 요구한 셈이다. 청와대를 나서는 이 원장은 머리가 복잡했다. 정보기관이 벌인 '공작'의 최대 피해자로서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중단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던 김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 전 원장의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에 실린 내용이다. 통치권자가 정보기관을 활용한 '국내정치 개입'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국회에서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사상 초유의 릴레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벌어지고 있다. 관심은 온통 필리버스터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에 쏠려 있지만, 사실 논란의 핵심은 국정원의 권한 확대다.


국정원에 테러 위험인물에 대한 추적·조사권을 부여하고, 통신 감청 범위를 확대하는 조항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야당은 국정원이 확대된 권한을 남용해 국내정치에 개입할 것을 우려한다. 추적·조사 또는 감청을 통해 얻은 정보를 악용해 야당 등 반대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공작정치'가 부활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반면 여당은 서면 절차 의무화 등 충분한 견제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맞서고 있다.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막을 수만 있다면 야당도 테러방지법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테러방지 업무는 전문가인 국정원에 맡기고, 국회는 국정원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문제는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막을 방법이다. 이는 결국 통치권자의 의지 문제다.

문민정부 이후 모든 정부가 정보기관의 국내정치 개입이란 악습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안기부 X파일' 사건,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보듯 유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안기부의 불법 도청조직 '미림팀'을 해체했지만 불과 1년만에 미림팀은 부활했다. 어느 정부에서건 임기말로 갈수록 대통령의 정보기관에 대한 의존도는 커졌다. 지지율 하락과 국정장악력 약화에 따른 고육지책이었을 터다.

정보기관에 대한 의존은 장기적으로 통치권자에게도 '독'이 될 수 있다. 역사상 최초의 정보기관은 15세기초 중국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만든 비밀정보조직 '동창'이었다. 관리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동창은 환관들의 국정농단에 악용되며 훗날 명나라 멸망의 씨앗이 됐다.

현 정부에서 국정원의 권한 남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건 박근혜 대통령뿐이다. 테러방지법 통과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보면 어떨까? "국정원이 테러방지법의 권한을 남용해 국내정치에 개입한다면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들 앞에 서약하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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