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처럼 '낮고 따뜻한' 사제로…엎드린 20명의 청년들

머니투데이 김지훈 기자 2016.02.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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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서품식'…'가시밭길' 걷기로 한 신부 20명 "그분 닮겠다"

5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20명의 사제들이 땅 바닥에 엎드려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의미의 '부복'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사진제공=천주교 서울대교구<br>
5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20명의 사제들이 땅 바닥에 엎드려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의미의 '부복'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사진제공=천주교 서울대교구


권혁신(29) 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가톨릭대 3학년 시절부터 사제관의 작은 독방에서 묵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작은 옷장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이 좁은 방에서 5년을 지낸 그는 5일 부제에서 사제, 즉 신부로 태어났다. 이날 오후 2시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사제서품식에서다. 권 신부는 자신의 결정으로 보통 사람은 감내하기 힘든 외로운 삶, 사제의 길을 평생 걷게 됐다.

이날 사제서품식에서 이른 나이에 '운명'을 결정한 사제가 권 신부를 포함, 20명이다. 이들은 서품식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는 의미로 땅바닥에 엎드리는 '부복'을 함께 했다. 그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청빈의 삶을 살고자 이들은 함께 엎드렸다.



사제 서품을 위한 성품성사는 가톨릭의 칠성사 중 하나다. 성직자로 선발된 이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해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림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축성되는 성사'를 일컫는다.

20명의 신부는 자신의 두 손을 합장하고 주교인 염수정 추기경과 후임자들에 대한 존경과 순명을 서약했다. 청년들은 봉사 직무에 적합한 성령의 은혜를 내려 주도록 하느님께 청원하는 고유의 축성 기도를 염 추기경에게 받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고 김수환 추기경.
서품식 행사를 주관하는 조재형 가브리엘 현 서울대교구 성소국 국장 신부는 이날 서품된 청년들보다 25년 먼저 사제로 서품됐다. 오는 16일 7주기를 맞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199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서품을 받은 신부다.

인구 고령화 등의 문제로 20여 년 전보다 수품자의 수는 줄었지만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천주교의 스승들, 선배들을 따라 신의 사랑을 전파하려는 소명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평생 청빈의 삶을 걸으며 사랑을 전파했다. 고인은 은퇴 후 보조금을 지급 받았지만 어려운 처지의 사람에게 나눠줬고, 남겨둔 많지 않은 재산도 신학교와 후배 사제들을 위해 썼다.


이날 서품된 청년 신부 20명의 재산 목록도 단출하다. 권 신부는 "옷가지 몇 벌, 핸드폰, 친구가 준 노트북컴퓨터가 있다"라며 "이 밖에 성경, 묵주, 수단, 성작과 같은 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기대감이 있지만 '잘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4일 서품식 예행연습 중인 권혁신 대건 안드레아 신부. /사진=김지훈 기자lhshy@mt.co.kr4일 서품식 예행연습 중인 권혁신 대건 안드레아 신부. /사진=김지훈 기자[email protected]
권 신부는 지난 4일 사제 서품식을 받기 전 마지막 밤 기자에게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항상 '낮은 곳'에 계셨고, 시대가 어려울 때 등불이 되신 분이자 사제로서 자신에게 철저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따뜻했던 분으로 알고 있다"며 "사제로서 그분을 본받으려 한다"고 말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 출생으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고인은 시대의 고비마다 사랑과 용서, 화해의 정신을 실천했다. 고인이 머물던 명동성당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고인은 2009년 2월 16일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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